나영석 진화론│① 보통 사람의 챔피언

2014.03.25

나영석 진화론
① 보통 사람의 챔피언
② 나영석 PD “나는 쿨하고 멋있는 사람이 아니다”
③ 진화의 일곱 계단

 

‘1박 2일’과 <꽃보다 할배>의 스타 PD. 나영석 PD가 현역 연출자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지도와 이름값을 지닌 예능 PD라는 걸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최고 시청률 50%를 넘나들던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의 전성기를 이끌고 CJ E&M에서 tvN <꽃보다 할배>로 역시 기록적인 케이블 시청률을 챙긴 외형적 배경으로, 다른 누군가는 자기 프로그램에 직접 등장해 출연자와 협상하는 얼굴을, 또 다른 누군가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연출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으로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나영석 PD는 단순히 이들 요소의 총합이 아니다. 이 요소들이 프로그램 연출 안에서 맞물리며 돌아가는 메커니즘에서 우리는 비로소 탁월한 동시에 여전히 조금씩 발전하는 예능 PD로서의 나영석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 PD라는 이름에 가려 정작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했던 그의 진면목에 대한 좀 더 정당한 평가를 <아이즈>가 준비했다. 타고나진 않았지만 조금씩 더 높은 곳을 향해 꾸준히 전진하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



“제가 양심 없는 PD로 유명해요.” tvN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에서 여행 경비를 줄이고선 책임을 몽땅 맏형 이순재에게 돌린 뒤, 나영석 PD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경비를 줄인다는 말에 모두들 반발할 때 그나마 중립을 지켜준 출연자에게 반 강제로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는 연출자라니. 하지만 이 짧은 장면에서 드러나는 건 나영석 PD의 양심 유무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밋밋한 여행에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출연자에게 압박을 주는 전략가로서의 나영석과 직접 카메라 앞에 등장해 이 서사를 시청자에게 쉽게 이해시키는 진행자로서의 나영석, 그리고 이순재가 느끼는 당혹감을 프로그램에 담아내며 그를 서사의 중심에 세우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나영석이 모여 협력 플레이를 펼친다. 그리고 이날 방송은 케이블로서 경이로운 7.7%의 평균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지금 나영석이라는 예능 PD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가 지휘했던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은 최고 시청률 50%를 기록하던 국민 예능이었고, CJ E&M으로 이적해서 만든 <꽃보다 할배>의 인기는 여러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릴 만한 파괴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처럼 검증된 흥행 능력은 오히려 그의 크리에이티브 능력에 대한 의문 부호로 이어졌다. 지난해 <꽃보다 할배>를 성공적으로 런칭했을 때, JTBC <썰전>의 허지웅은 나영석 PD를 빌 게이츠에 비유하며 매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안전한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1박 2일’에 이어 여행이라는 포맷을 선택한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예능 PD로서의 나영석이 어떻게 재미를 만들어내느냐는 측면에서 이건 명백한 오독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히 인식되어 있지 않다는 헤겔의 잠언은 적어도 여기서는 진실이다.

비록 같은 포맷을 매주 유지했지만 ‘1박 2일’ 시절에도 나영석 PD는 하나의 설계도를 만든 뒤 그 안에 출연자를 밀어 넣어 변수를 통제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행이라는 이벤트 안에서 출연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고 즐겁게 움직이도록 독려한 뒤, 그 안에서 등장한 다양한 변수를 긁어모아 매회 새로운 이야기를 조합하는 타입에 가깝다. 복불복과 야외 취침으로 대표되던 초기의 재미 포인트는 조금씩 철없는 남자들이 여행에서 벌이는 소동극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생고생이 주는 자극적 재미는 줄었지만 이야기는 좀 더 리얼해지고 깊어졌다. 스태프 없이 멤버들만 자유 여행을 보낸 ‘우리끼리 산골여행 편’처럼 리얼 버라이어티의 양대 산맥이던 ‘1박 2일’은 서서히 리얼리티 쇼로 소급해갔다. 그가 KBS를 떠나 전문 예능인이 철저히 배제된 여행 리얼리티 쇼인 <꽃보다 할배>를 만든 건 우연이 아니다.


<꽃보다 할배>의 성공은 그래서 흥행 청부사 나영석의 능력을 새삼 검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1박 2일’ 시절보다 진화한 그의 연출력을 증명한다. 방송을 의식하고 그에 맞는 분량을 뽑아내는 전문 예능인은 좀 더 진솔한 서사를 담아내고 싶은 입장에선 오히려 일종의 한계가 된다. <꽃보다 할배>는 예능에 미숙하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할아버지 4인방으로 이러한 한계를 돌파한다. 때문에 인위적 개입 없이도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연출이 중요해진다. 스스로 “미분”이라 표현할 정도로 각각의 녹화 분량을 잘게 쪼갠 뒤, 각 캐릭터의 가장 흥미로운 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어붙이는 나영석 PD의 방법론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첫 여행이던 ‘유럽 편’에서 무거운 반찬통을 집어 던지는 백일섭의 돌발 행동과 걷는 걸 힘들어하는 백일섭 캐릭터에 집중한 뒤, 그럼에도 열차에서 빈자리가 났을 때 이순재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을 이어붙이며 가슴 짠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이번 ‘스페인 편’에서 길을 잃은 뒤 나 홀로 집을 찾아 걷던 이순재는 지난 시즌의 ‘직진순재’ 그대로였지만, 집에 도착한 뒤 다시 동생들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지난 화에서 여행 경비를 적게 받고 동생들에게 미안해하던 장면과 호응하며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연출 방법이 천재적인 건 아닐지 모른다. 드라마를 강조하기 위해 빽빽한 음악과 자막으로 채우는 것이 혹자의 말대로 가끔 촌스럽거나 오그라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종종 과해 보이는 이런 연출은 인위적 설정과 전문 MC를 배제한 채 리얼리티와 재미를 극한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최종 답안에 가깝다. “0에 수렴”할 정도로 장면을 쪼개고 그 안에서 가장 재밌고 일관된 스토리라인을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전체 서사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재밌어 보이는 장면을 넣고 싶은 유혹과도 싸워야 한다. 유려하진 않지만 때론 촌스럽고 투박하기에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있다. 연예인 병이라는 오해를 사면서까지 카메라 앞에 나서 진행자 역할을 하는 순간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양 빠지게 나서기보다는 카메라 뒤에서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면 멋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현장에서 PD는 고상한 설계자가 되어 뒤로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필요하면 오해나 미움을 사더라도 직접 등장해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으로 시청자를 몰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중원의 사령관이 언제나 아름다운 패스로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건 아니다. 패스할 공간이 없을 만큼 수비가 빽빽하다면 투박하게나마 육탄으로 돌파해야 한다. 스스로를 양심 없는 존재로 묘사하면서라도.

지금 나영석 PD의 연출을 보는 건, 그래서 보통 사람이 노력을 통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마지노선을 확인하는 느낌이다. 그의 연출은 천재적이라기보다는 초인적이다. 어떤 유파의 검술이든 한 번 보고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천재 검사가 아닌, 바위가 깨질 때까지 천 번이든 만 번이든 휘두르며 자기가 아는 한 가지 방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우직한 검사의 굳은살 같은 것이 그의 연출 곳곳에 박혀 있다. 분명 세상엔 다른 사람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걸 툭툭 끄집어내는 천재들이 있다. 하지만 그조차 무한한 경우의 수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 무한한 각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루하지만 의미 있는 모험을 할 때, 궁극적으로 살리에리도 모차르트의 그것과 같은 음표 진행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 할배들의 여행보다 나영석이라는 연출자가 걷고 있는 여정의 끝이 궁금한 건 그래서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노력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종 마지노선을 조금씩 밀어 올리는 그 여정이.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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