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와 맨몸, 음란함은 누구의 몫인가

2014.06.30

뉴욕의 스톤월 인은 그저 그런 게이 바였다. 컵은 대충 씻어 재사용하고, 화장실은 자주 역류하고, 심지어 화재 비상구도 없는. 그래도 이곳은 60년대 뉴욕에서 게이, 레즈비언, 드랙 퀸 등이 모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술집이었다. 경찰은 대개 뒷돈을 받으며 이 ‘변태 집합소’의 존재를 묵인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갑자기 불이 켜지고 검문이 시작되었다. 미성년자와 복장전환자들이 체포되어 호송차를 기다리는 중(그래, 다른 성별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체포되던 시대였다), 바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평소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대신 주변을 서성였다. 체포에 격렬하게 저항하다 제압된 한 ‘돌부치’가 이들을 힐책했다. “당신들 그렇게 가만히만 있을 거요?” 그나마 해방감을 느낄 구질구질한 공간마저 침탈당한 변태(queer)들이 결국 폭발했다. 1969년 6월 28일,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의 서막이었다.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은 스톤월 항쟁을 기리며 시작된 행사다. 국가의 탄압과 혐오에 대항한 경험이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고양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그 존재를 알리는 행사로 거듭났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육제 마지막 날 마디 그라(Mardi Gras) 축제와 결합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도 2000년 ‘무지개2000’을 시작으로 매년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토론과 공연, 50여 명 규모의 퍼레이드로 시작되었던 이 행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만 명 넘게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모두의 축제가 되어 지난 6월 7일 15회째를 맞이했다.

혐오 세력의 조직적인 반대로 오랜 시간 지연된 이번 퍼레이드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이런저런 술렁거림이 들려온다. 맨몸을 드러낸 퍼레이드 참가자 사진에 “성소수자는 지지하지만 노출은 불쾌하다”는 댓글이 달린다. 개중 전략적 행보를 주문하는 꽤 그럴싸한 의견도 있다. 괜히 ‘일반인’의 불쾌감을 조장하면 성소수자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긍심 행진은 ‘일반인’의 동정심과 관용을 갈구하는 처절한 아양이 아니다. 이날 성소수자는 탄압과 혐오에 맞서 싸우고 자신들의 엄연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행진한다. 어떻게 생겨먹었든 나는 나 자신이고, 이런 나를 사랑한다. 정체성의 부정과 사회적 낙인이라는 일련의 경험 속에서 이 자긍심은 성소수자가 하나의 주체로 거듭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보든,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다. 적어도 오늘은 그 ‘변태스러운’ 나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이 해방감과 자기 긍정이 퍼레이드의 핵심이기에 “일반인을 설득할 수 없다”는 질타는 사실 좀 뜬금없는 비판인 셈이다.


그럼에도 노출은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기 긍정이 굳이 맨몸뚱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느냐고. 호모포비아들에게 성소수자는 잠재적 성추행범이나 성병 매개체와 같은 극단적이고 음성적인 성적 존재로만 인지되기 마련이다. 퍼레이드에서의 맨몸 노출은 이 해석에 반기를 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다. 재미있는 것은 노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호모포비아가 아님’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단지 노출에는 ‘부작용’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이 본다거나, 경범죄에 해당한다거나. 이 같은 비판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같은 명화나 퍼레이드에서 조각 같은 외모를 뽐내는 서양 게이, 시위 중 웃통을 벗은 어버이연합 회원에게 적용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다양한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맨몸에 ‘외설’을 덧씌우는 건 누구인가. 이 경우 음란함은, 당신들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맨몸을 노출한 퍼레이드 참가자에 대한 비판은 그 존재에 대한 불편함에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가 바다 건너 어느 나라의 해프닝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야 만 불편함. 강직된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이들을 보고 놀랄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사회적 소수자는 착하고 유익하며 아름답기 때문에 보호해야 하는 천연기념물 같은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는 어찌 됐든 당신 옆에 이렇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여기 있고, 나는 소위 말하는 ‘변태’다. 당신이 익숙해져라(I’m here, I’m queer, get used to it).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진정 바란다면, 불편하더라도 당신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원래부터 당신이 ‘불편해하는’ 식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MECO
퀴어니 성소수자니 LGBT니 하는 단어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본업은 섹슈얼리티와 별 상관이 없는 대학원생 겸 등골브레이커. 사람 좀 만나보겠다고 트위터와 블로그를 시작했다. 꿈은 높았지만 현실은 네트워크에서도 건어물 인증.

사진제공. 퀴어문화축제│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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