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근육으로 무장한 안영이를 위하여

2014.11.17

김애란의 어느 단편 소설에서 ‘사회생활의 적은 수줍음’이라는 글귀를 읽고 마음이 스산했던 적이 있다. 스물일곱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한 광고회사 AE 사원으로 입사했던 해였다. 한 달간의 인턴 생활을 마치고 정사원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면담 자리에서 사장님은 “샤이(shy)해 보여서 뽑을지 좀 고민했는데, 잘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1년 7개월 후 그곳을 퇴사할 때까지 나는 사장님이 만족할 만큼 ‘샤이하지 않은’ 사원은 아니었다. 그건 내성적이라서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뻣뻣해서였고 살갑지 않아서였다.

tvN <미생>의 안영이(강소라)는 사수인 하 대리(전석호)에게 갖은 모욕적인 언사와 부당한 대우를 당한다. 비단 하 대리만이 아니라 안영이가 속한 자원팀은 과장에 부장까지 “이래서 여자랑 일을 못 하겠단 말이야”, “진짜 여자들이 문제야”, “그게 다 여자들이 의리가 없어서 그래”라는 성차별 발언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투성이다. 그들은 왜 안영이를 싫어하는가. 일차적으로는 안영이가 타 팀에서도 탐내는 잘난 여자라서다. 하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뭐가 이렇게 뻣뻣해? 죄송하다고 안 해?”라는 하 대리의 말 속에 있다. 그들은 안영이가 잘난 데다 뻣뻣하기까지 한 여자라서 싫다. 


안영이를 보며 신입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안영이만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함께 일한 상사나 동료에게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은 적은 없다. 다만, 안영이처럼 쉽게 웃지 않고 쉽사리 틈을 주지 않는 뻣뻣한 신입 사원, 여자 후배였다. 그래서 내성적이거나 차갑거나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의 위력은 직장생활에서 더욱 크다. 한석율(변요한)이 대표적인 예다. 넉살 좋고 분위기 파악 빠르고, 무엇보다 잘 웃는 한석율은 미워도 밉지가 않은 캐릭터다. 반면, 업무를 위해서라면 가슴과 엉덩이에 뽕을 넣고 짙은 화장으로 무장할 수 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는 활짝 웃지 않고 여자라는 이유로 쓸데없는 도움을 원치 않는 안영이는 잘난 남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냥 져주세요.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하세요.” 장백기(강하늘)의 조언이 지금 필요한 답인 것을 안영이도 안다. 하지만 인턴 시절, 짐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장백기에게 “왜요?”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안영이는 그냥 져주는 걸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좀 참고 버티거나 수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후자가 많을수록 사회생활이 고달파진다. 특히, 이런 여성 직장인이 자신들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지만 상당히 찌질한 생각으로 무장한 남성들과 함께 일한다면, 이는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도 쉽사리 상쇄할 수 없는 흠이 되곤 한다.

이 땅의 수많은 안영이들은 참 답답하고 억울할 게다. 그녀들은 영어도 잘하고, 문서도 잘 만들고, 무거운 짐도 혼자 들 수 있고, 심지어 무릎과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생수통도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살가운 태도와 밝은 미소가 더 동료와 상사를 편안하게 해주는 세계에서 너무나 피곤할 게다. 그래서 안영이의 고난을 보고 있으면 참 심란하다. 하지만 “의리가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멋있는 여자”인 안영이라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 신입이니까, 여자니까,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이니까, 라는 변명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이라서 고맙다.

안영이가 지금을 버텨내고 대리, 과장, 차장이 된다 해도 지금처럼 뻣뻣한 여자라면 어떤 못난 남자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한 선배이자 상사일 거다. 세상에 오 과장(이성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장백기 같은 동기도 안영이와 자신이 둘 중 하나의 선택지로 놓인다면 남자들의 세계에서 더 유리한 남자로서의 자신을 어필할 것이다. 선 차장(신은정)처럼 워킹맘이 된다면, 안영이의 고난은 두 배, 세 배가 될 것이 빤하다. 그래서 더욱, 안영이를 응원한다. 자신의 이름을 여직원이 아니라 직원에 두는 직장인으로, 옳은 일 앞에 비겁해지지 않는 사회인으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안면 근육 쓰는 일에는 좀 서툴러도 믿고 맡길 수 있는 튼튼한 일 근육을 가진 수많은 안영이들이 동료로서 합당한 존중을 받으며 일하는 세상도 함께 오기를 기대한다.

글. 김희주(칼럼니스트)
교정. 김영진




목록

SPECIAL

image 스탠드업 코미디

MAGAZINE

  • imageVol.171
  • imageVol.170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