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저씨’라는 말이 싫어요?

2014.11.18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카세 료)와 남희(정은채)에게 오지랖 넓게 참견하고 수작을 거는 상원(김의성)은 전형적인 한국형 ‘개저씨’의 모습을 보여준다.

얼마 전, 두 남자의 서로 다른 발언이 수많은 여성들의 공분을 샀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3일 새누리당에서 열린 중앙여성위원회 임명식에서 여성 비례 공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아기 많이 낳은 순서대로 비례 공천을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사흘 뒤, 진보 성향 매체 <시사IN>의 고재열 기자는 방송에서 가수 장기하에게 “침대 위가 궁금한 남자”라 했던 곽정은 칼럼니스트에 대해 ‘곽 기자는 25-35 여성들의 욕망을 대변’하며 ‘그 욕망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예인과 썸을 타보는 것’이라 페이스북에 정의했다. 졸지에 25-35세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은 연예인과 썸을 타는 애정 욕구로 소급됐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 모두 상대 여성을 존중한답시고 해당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김무성 대표는 같은 자리에서 “모성애가 우리 사회를 이끄는 힘”이라 말했고, 고재열 기자는 침대 발언으로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곽정은 칼럼니스트에게 응원의 메시지로 그런 말을 했다.

여성에게 결과적인 무례를 저지른다. 의도로 결과를 정당화한다. 딱히 보수 진보 구분 없이 벌어진다. 비슷한 시기에 터져 나온 두 사람의 발언은 소위 ‘개저씨’로 불리는 무례한 어떤 한국 중년 남자들의 성향을 상징적으로 요약한다.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인 ‘개저씨’가 온라인에 등장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등장 자체가 최근인 건 아니다. ‘개저씨’ 피해 사례라고 공개되는 수많은 일화는 결코 낯설지 않다. 택시 기사는 여자 승객에게 “자기야” 소리를 서슴지 않고, 남자 손님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반말은 예사다. 지하철에 탄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은 수많은 사람 중 이십 대 초반의 여성에게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며 고래고래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한 건 약 10년 전 개인적으로 직접 목격한 일이다. 요컨대 만만한 대상, 거의 대부분의 경우 여성에게 한 줌 혹은 그 이상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나이든 남성들은 오랜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해왔다. ‘개저씨’나 ‘된장녀’나 특정 성을 비하한다는 면에서 똑같다는 주장이 안일한 건 그래서다. ‘된장녀’가 일부의, 그것도 딱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비 행위를 젊은 여성 전반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개념이라면, ‘개저씨’는 남자 상사의 프리허그가 있는 직장과 아저씨가 초면인 젊은 여성에게 치마가 짧다고 시비를 거는 버스 등 우리 일상에 권력으로서 실재한다.

이것은 전근대적인 남성본위사상의 잔재일까.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의 사례에서 남자들은, 남자는 하늘이라는 식의 호기보다는 눈앞의 상대적 약자를 놓치지 않는 계산적인 음험함을 보여준다. 정규직이 되기만을 바라며 성추행도 견디다가 정규직 전환 실패에 자살했던 스물다섯 살 계약직 여성처럼,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은 약자를 정확히 골라낸다. 그들의 세상은 강자와 약자, 갑과 을로 구분된다. 한국에서 학습되는 남성성이란 이런 위계관계를 내면화하는 것에 가깝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자신의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남자의 탄생>에서 “학교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공간이라기보다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걸 배우는 곳이라 술회한다. 여성학자 권인숙은 저서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한국의 군사화는 (중략) 국가주의적 질서에 대한 내면화에서 드러난다. (중략) 집단의 위계적 문화는 목적 수행을 위해 타당한 질서로서 받아들였다”고 분석한다. 즉 상당수 남성들에게 서열 관계를 통한 권력 행사는 편의적이기 이전에 옳은 것이다. 그래서 쉽게 정당화된다.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때 권력 행사나 통제의 욕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집단적으로 훈련받는 남성들”(<대한민국은 군대다>)이 이미 과거부터 남성 위주로 짜인 사회와 역시 수직적인 직장의 관료제 안에서 조직 논리를 알리바이 삼아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런 상당수 중년 남성의 무례함과 폭력은 개인 인격의 문제만으로 소급하기 어렵다. 그들도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갑을 관계에서 ‘갑질’을 하지 않는 인격적 성숙함도 중요하다. 하지만 인격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상을 서열화해서 바라보는 관점 자체다. 앞서 인용한 김무성 대표와 고재열 기자의 헛발질을 단순히 지성과 인격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는 여성성을 긍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건 인정하지 않는다. 고재열 기자는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부르짖었지만, 여성 섹스 칼럼니스트가 남성 출연자를 평가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여성의 욕망이란 남자 연예인과 썸을 타보길 원하는 종속적인 관계로서만 긍정될 뿐이다. 심지어 그는 전혀 엉뚱한 진단을 내리면서도 곽정은에게 더 문제 될 발언을 요구하고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획책한다. 깨어 있는 남성은 여성의 입장에 서는 것에서조차 여성을 능가하기에 여성을 이끌 수 있다. 이것이 ‘개저씨’의 논리다. 좌우보다 우선하는 건 상하다.

물론 여전히 ‘개저씨’라는 표현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하하는 표현을 이용한 조롱은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썰렁한 농담을 하는 순간에조차 웃기는 나와 웃어줘야 하는 너희의 구도로 권력을 재확인하고야 마는 아저씨들 중심의 세계에서, 심지어 자신들의 입장을 말하는 포지션조차 깨어 있는 아저씨들에게 빼앗긴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는 담론의 영역에서조차 주변부로 밀린다. 비대칭적인 구도에서 소통을 통한 합리적인 문제 제기와 해결은 요원하다. ‘개저씨’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냐는 문제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언어로 이 질서에 균열을 내는 건 그래서 유의미하다. 갓 입사한 젊은 여성처럼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만한 대상만 골라 한 줌 권력을 행사하는 건, 남자다움도 뭣도 아닌 그냥 개 같은 거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을, 두려움의 시선이 아닌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기울어진 질서는 아주 조금 균형을 맞춘다. 물론 아직 현실에서 변한 건 별로 없다. 이것은 평등한 다툼을 위한 아주 최소한의 발걸음이다. 그러니 지금, ‘개저씨’라는 말에 세상이 무너져라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개저씨’라는 표현이 사라질 미래를 향한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니까.

글. 위근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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