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키드’가 <에반게리온>의 물음에 답하다

2014.11.21

“난 뭐지?” 신지가 말했다. 열네 살 때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이었다. 신지와 같은 나이였던 나는 ‘바카(바보) 신지’를 보며 나 자신을 투영하곤 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히로인이었던 레이나 아스카를 좋아했지만, 열네 살의 나는 신지의 시선에서 미사토가 좋았다. 미사토는 신지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했고,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에서는 네르프 전술작전부 작전국의 대령이며, 사도가 나타나면 작전을 지휘하는 멋진 “미사토 누나”였다. 그런 미사토를 보며 나도 스물아홉이 되면 멋진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사토의 나이가 된 지금, 내가 그와 닮은 것은 청소를 못해 방을 쓰레기통처럼 만드는 것뿐이다. 서른이 다 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열네 살에는 서른쯤 되면 무엇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미사토가 소령에서 대령이 됐고, <에반게리온: Q>(이하 < Q >)에서 함장이 됐던 것처럼.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2001년에 발간된 ‘마니아 1세대 16인이 쓴 애니메이션 개론서’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애니메이션 시크리트 파일>이란 책에는 당시 애니메이션의 팬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서른 전후에 도달한 그들은 한국판 <뉴타입> 편집장, 부천만화정보센터 큐레이터, 투니버스 PD 등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1970년대 전후 세대인 그들은 대중문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면 ‘마니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생에게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돼버렸다.

“(옛날에) 옆집 스물여덟 형이 애니메이션도 보여주고, 맨날 게임도 시켜줬다. (중략) 그 형은 여자친구도 있고 차도 있고. 내가 그 형처럼 될지 몰랐는데.”
“넌 그 형처럼 안 됐지. 여자친구도 없고 차도 없잖아.”


다큐멘터리 <에바로드>에서 박현복 씨와 이종호 씨의 대화는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어떤 세대의 정서를 보여준다. 1980년대생인 두 사람은 <에반게리온>의 제작사 가이낙스가 주최한 ‘에바 스탬프 랠리’에 참여하는 과정을 담아 <에바로드>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가이낙스가 주는 스탬프를 받기 위해 4개국을 돌았다. 그리고 제작자 후기를 통해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딱히 정해진 답이 없는 자아성찰적 물음을 던졌다.” 그들은 서른이 됐지만, 여전히 열네 살 신지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 그들이 스스로를 ‘에바키드’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린 시절 <에반게리온>을 보던 그들은 아직 미사토 같은 어른이 되지 못했고, “서른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못 이뤘다”(<시사IN> 인터뷰)고 말하며 여전히 자신에 대해 묻는다.

극장판 < Q >에서 ‘바카 신지’는 ‘가키(애송이) 신지’가 됐고, 신지는 서드 임팩트를 일으킨 후 14년의 시간을 잃어 혼자 열네 살인 채로 있다. 나머지는 모두 어른이 됐다. 하지만 신지가 자의로 애송이로 남은 게 아니듯, ‘에바키드’도 마찬가지다. ‘마니아’라는 말 대신 ‘오타쿠’라는 말이 쓰이던 시절에 애니메이션을 본 이들은 열심히 좋아하는 것만으로 사회에서 자리 잡기 어려웠다. 대신 ‘88만 원 세대’라는 말을 들으며 성공이 아닌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어떻게 사느냐 이전에 무엇을, 무슨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부터 답해야 하는 세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장강명의 소설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에바키드’의 삶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손가정에서 자란 주인공 종현은 돈에 의해 삶이 좌우되고, 생존 때문에 꿈이라는 걸 실현해본 적이 없다. 종현이 형에게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가서 사람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사주고 싶어서”였다. 이런 세상에서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라고 말해주는 것은 <에반게리온>뿐이었다. 그래서 종현은 ‘하청의 하청’을 받아 일하는 IT 회사에서 어떻게든 휴가를 받아내 ‘에반게리온 스탬프랠리’에 참여한다. 스물아홉, 황량하게 살았던 20대를 보상받기 위해서다. 꿈도 희망도 없고 사도로부터 이 지구를 지켜내는 생존밖에 없는 세계. 그것이 <에반게리온>이었고, 그 세계는 198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현실이 되었다.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야키는 < Q >에서 ‘애송이’ 신지를 통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세상 밖으로 나올 것, 그리고 어른이 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에바키드’에게는 나갈 세상이 없었고, 어른이 될 기회도 많지 않다. 대신 그들은 어떻게든 일하며 자신이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이른바 ‘덕질’을 하고,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아 <에바로드>를 만들었다. 사회에서 쉽게 어른이 되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세의 목소리를 남긴다. 신지가 아무리 찌질해도 도망가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것처럼, 그들도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 무언가가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에바키드’가 “난 뭐지?”라는 신지의 물음에 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답을 찾는 과정은 계속된다. ‘에바키드’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반게리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글. 이지혜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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