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다음 날, 당신의 서재는 무사합니까

2014.11.24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11월 21일, 개정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날로부터 앞선 열흘가량의 기간 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도서정가제 시행 전 마지막 세일! 최대 50% 할인!”이라는 떡밥을 아낌없이 뿌려댔고 “할인/쿠폰은 11월 20일까지 사용 가능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와 위기감을 더했다. 이에 기꺼이 낚여 책을 ‘지른’ 사람들은 자책을 빙자한 할인 정보를 널리 퍼뜨려 자신과 같은 충동구매자들을 양산했다. 이 기묘한 열기를 두고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교수는 “(트위터) 타임라인만 놓고 보면, 11월 21일에 세상은 망하고, 신이 11월 20일까지 평생 구입한 책의 무게로 인간들의 천국행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것 같은 모양새”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내 평생 책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나날이었다. 한 권의 책도 더 사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 내가 지고 갈 업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 35년 만에.

지난가을, 내가 부모님 집에서 나가 사는 것이 결정되자마자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빈 박스를 구해와 온 집 안의 책을 쓸어 담는 것이었다. “다 가지고 나가라.” 폭풍 같은 도서 색출 작업이 끝나자 35개의 상자가 쌓였다. 적게 잡아도 1,500권 이상, 무게로도 500kg이 넘었다. 그제야 그동안 샀던 책들이 구체적인 무게이자 부피로 눈앞을 턱 가로막았다. 물론 이 정도는 장서가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스무 살 이후 돈이 생길 때마다 제일 자주 산 것이 책이었을 뿐이다. 월급을 받게 되고 나서는 한 달에 한두 번, 허기진 사람처럼 책을 사들였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전집을 샀던 2010년 ‘리브로 대란’을 비롯해 대란이란 대란에는 다 참전했다. 폐점 세일을 하는 도서대여점이나 헌책방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열왕대전기> 초판이 있지만 개정판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결과 2.5평에 조금 못 미치는 내 방은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책장, 책으로 뒤덮여 사용할 수 없게 된 책상, 숨겨둔 책으로 가득 차 기울어진 서랍장, 이부자리와 문을 열 틈만 남기고 바닥을 가득 메운 책의 탑들에 점령당했다. 곧이어 책 상자는 슬금슬금 안방을 차지했고, 일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수십 권의 책을 작업 방에 쌓아둔 뒤로는 또 다른 책을 사서 공간을 메웠다.

모으려고 산 건 아니었다. 읽으려고 산 거였다. 언젠가는. 그리고 옷보다 책을 사는 게 더 익숙했을 뿐이다. 책은 옷처럼 너무 작거나 어울리지 않아 낭패할 일 없이 매번 성공을 보장하는 쇼핑 아이템이었고, 재미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의미라도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을 쓴 톰 라비가 친구에게 같이 서점에 가자고 했을 때, 상대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던졌다는 질문에서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 마지막으로 옷을 산 게 언제지?” 책에 생활을 빼앗긴 사람의 패턴이란 이다지도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톰 라비가 만든 ‘책 중독자 테스트’에서 모르고 같은 책을 두 번 사거나, 단지 할인 판매를 한다는 이유로 책을 사거나, 갑자기 확실치 않은 주제에 깊이 흥미를 느껴 그 주제에 관한 책을 여섯 권 이상 산 적이 있다는 등 25개 문항 중 절반에 못 미치는 12개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서 알게 됐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나는 “지금 협곡 벽에 비명소리를 울리며 공중에 떠 있는, 즉 바닥에 내꽂히는 것은 시간문제”인 상태였다. 하지만 문고판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몇 권 가지고 있다가 런던 여행을 갔을 때 영어공부 삼아 단편 전집을 사고, 직장인이 된 뒤에 전집을 사고, <주석 달린 셜록 홈즈>가 나오자 당연히 샀던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전집에 주석이 달려 있다는데, 궁금하고 갖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나!

문제는 내 욕망에 비해 내게 허용되는 공간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사실이다.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에 등장하는 19세기 영국의 장서가 리처드 히버는 똑같은 책을 두세 권 이상 사들이는 버릇이 있어 20~30만 권 정도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국과 유럽 대륙에 여덟 채나 되는 집이 있었다. 10평 안팎의 공간을 혼자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한국의 20~30대가 책장 하나 이상의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점점 무리한 바람이 되고 있다.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에는 책의 무게 때문에 목조 건물 바닥이 뚫리거나 집이 기울었다는 등의 에피소드도 종종 등장하는데, 짧으면 1~2년 주기로 이사를 고민해야 하는 세입자로선 당장 집이 무너지지 않더라도 심리적 무게가 만만치 않다.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서재 결혼시키기’처럼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라 ‘대격돌’이라 불러야 할 갈등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책은 살 때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든다. 한정된 생활공간은 점점 책에 잠식된다. 버리거나, 내다 팔거나, 근본적으로는 최대한 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e북과 북 스캔으로 일찍 방향을 튼 이들은 이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손에 닿는, 고개를 돌리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책은 내용물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 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라는 오카자키 다케시의 말처럼, 종이책의 형태는 그것의 본질과 너무나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음악을 음원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CD와 LP를 사 모으며 그 미묘한 차이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라면 이 부질없어 보이는 고집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불편이 곧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카자키 다케시는 책 한 권 내내 여러 사람이 겪은 ‘장서의 괴로움’에 대해 토로한 끝에 후기에서 진짜 속마음을 말한다. 책이 너무 늘어 걱정이라는 투정은 “원, 사치스런 여자라 돈이 얼마나 드는지”나 “별 볼 일 없는 남자라 얼른 헤어지려는데 어떻게 생각해?”처럼 자랑삼아 자기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다. 감당하지 못해 허덕이면서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자신을 못 이기는 척 용서한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대부분 가격은 하락하고 먼지와 좀만 증식하는 이 종이뭉치들에 대한 집착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종이책이 남아 있다면 책과 함께, 책을 모시며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이 대책 없는 사람들은 기꺼이 책에 파묻혀 죽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두 권의 신간을 사야만 했고 책 더미 어딘가에 있을 책 두 권을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결국 나머지 한 권은 어디서도 구하지 못했다. <장서의 괴로움>의 추천사를 쓴 장정일은 집 안의 모든 공간을 잠식해버린 책 때문에 꼭 참조해야 할 책을 찾지 못하는 사정을 토로하며 “내 글이 어딘가 부족하고 엉터리다 싶을 때마다 늘 이런 사정이 있다는 것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다. 동감이다.)

글, 사진. 최지은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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