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고래], 읽는 이를 압도하는 입담의 힘

2015.03.13

지상에 아주 큰 동물이 있다고 하자. 예를 들자면 코끼리 정도가 좋겠다. 본 적이 없는 동물이라면 공룡이라도 괜찮다. 비교할 수 없어 상상이 불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큰 나무를 떠올리고, 그 나무의 기둥만 한 다리를 가진 거대한 동물을 상상하자. 그리고 그 미지의 동물과 실제로 이 지구에서 가장 큰 동물을 비교해보자. 그 동물의 이름은 대왕고래. 언제나, 당신의 상상보다 더 거대한 동물이다. [고래]도 대왕고래와 같다. 단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사람들이 한 권 분량의 장편소설에 대해 기대하고 상상하는 이야기보다 몇 배는 크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오랜 기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런 소설이라면 이야기의 중심축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노파의 저주로 시작해 그 저주의 그늘 아래 살게 된 금복과 춘희 모녀의 삶에 있지만, [고래] 속 이야기꾼은 그 기둥에서 수많은 잔가지를 뻗어내 그 운명에 얽힌 이들의 삶과 죽음을 술술 풀어낸다.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삶이 예측할 수 없는 운명과 또 우연 속에서 피고 진다. “독재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장군”의 세계에서 내려와 온갖 세상사, 역사의 중심에서는 완전히 비켜서 있는 사람들의 삶이 기막힌 이야기꾼의 솜씨에 조탁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나 소설 한 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문단, 한 장만큼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문장의 힘이라기보다는 입담의 힘이며, 이 모든 이야기를 미리 알고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밀고 당기는 재주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고, 세상 어디든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을 수 있는 그의 방식으로라면,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래]는 크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대왕고래보다도 크다.

[고래]에서 사회역사적인 배경은 인물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군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볼품없는 장군의 시대까지 시간은 흘러가지만, 이야기의 주 무대인 평대는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고립되어 전쟁으로부터 비켜 갈 수 있었고,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장군의 법칙 역시 이 소설을 구성하는 수많은 법칙 중 하나로만 등장할 뿐이다. 현실과 역사적 사실보다는 저잣거리에 떠도는 말들의 이면과 역사가 호명하지 않는 존재들의 기구한 삶에 집중하는 [고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본 적 없는 이들의 삶을 또 다른 역사로 불러온다. 개연성이나 인과관계, ‘있을 법한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들과 알 수 없는 존재가 휘두르는 운명에 따라 흘러가는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결코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세상이 변해도, 이야기는 남고 또 계속 이어져 갈 것이다. 세상이 역사를 기록하는 동안, 소설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제 몫이라는 듯 [고래]의 이야기꾼은 끝을 말하는 대신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선언한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12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고래]와 같은 한국 소설을 만나보지 못했다. [고래]가 가장 좋은 소설이라거나, 가장 아끼는 소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고래]와 같은 소설은 단 한 권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입담에 홀려 저절로 책장을 넘기고 넘기다 보면 훌쩍 시간이 흘러 있는,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은 [고래]가 유일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독서, 곧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400장에 이르는 장편 소설을 저절로 읽는 독서를 체험했고,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어쩌면 전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래]는 줄 긋고 싶은 문장, 매력적인 등장인물, 흥미로운 사건,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나 정서가 아니라 한 덩어리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바다에서 처음 고래를 봤을 때 그 거대함과 생명력에 압도되었던 금복처럼, [고래]라는 소설은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이야기꾼이 가감하고 변형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드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특별한 독서를 체험한 다음의 일이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고래]는 [고래]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 자그마한 반짝임이 무엇이었는지는, 읽은 다음에 이야기하자.

윤이나
보험과 연금의 혜택을 호주 공장에서 일할 때만 받아본 비정규직 마감 노동자. 책도 읽고, 영화와 공연도 보고, 축구도 보고, 춤도 추고, 원고 청탁 전화도 받는다. 보통 노는 것같이 보이지만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다.

디자인. 전유림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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