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연애], 썸타는 당신을 위한 전략교본

2015.03.20
‘썸’이 신조어 대접을 받으면서 사회 현상으로 등장했을 때, 내가 본 가장 기괴한 해석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부족해서 그렇다. 불쌍한 젊은이들!” 이런 불쌍한 어른들을 보았나. 일련의 짝짓기 프로세스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고 변수 많은 한 대목만 뽑아내면 그게 썸이다. 썸은 유사연애 대리만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체리피킹이다. 그냥 부러워하시면 됩니다.

짝짓기 프로세스에서 이 결정적인 단계를 추출해 낼수록 연애는 순수한 전략 게임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바둑이나 체스 같은 게 된다. 썸이 흥미로운 전략 게임인 이유는 두 성이 가진 자원의 속성이 달라서다. 임신도 출산도 하지 않는 남성은 짝짓기의 비용이 싸다. 공격적이고, 모험적이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래서 자다가 이불 걷어찰 짓을 더 많이 한다. 여성은 짝짓기 비용이 비싼 성이다. 신중하고, 상대의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고, 선택권을 행사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면, 번식에 투자하는 자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남성이 구애하고 여성이 선택하는 짝짓기 전략이 흔하게 진화했다.

여기까지는 진화심리학 대중서에 늘 나오는 이야기다. 재기발랄한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한 발 더 나간다. 겨우 35살이던 2000년에 쓴 <연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류는 썸타다가 진화했다.” 아 물론 그가 썸이라는 말을 알 리 없다. 밀러는 생존 경쟁(자연 선택)보다도 짝짓기 경쟁(성 선택)이 인류가 진화하는 결정적 조건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썸이야말로 짝짓기 경쟁의 정수 아닌가. 그러니 저 정도 초월번역은 용서받을게다.

생존 경쟁과 짝짓기 경쟁은 문법이 다르다. 최적화의 논리가 생존 경쟁을 지배한다면, 짝짓기 경쟁은 과시와 낭비의 세계다. 공작새 수컷의 화려하고 거치적거리는 꼬리는 거의 자연의 농담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잡아먹히기 쉬운 특징이 진화의 거름막을 통과했을까. 공작새 꼬리는 건강, 신체능력, 기생충 없음을 과시하는 광고판이다.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낭비야말로 효과적인 광고다. 낭비를 감당할 만큼 우수한 유전자라는 신호라서다. 로고를 세련되게 드러낸 핸드백, 디지털 시대의 기계식 손목시계는 우리 세계의 공작새 꼬리다.

밀러는 심지어 인간의 뇌도 낭비를 과시하느라 진화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는다. 그렇게 크고 무겁고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 무언가를 들고도 생존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짝짓기 경쟁에서는 훌륭한 광고다. 그가 학계에서 얼마나 인정받는지는 우리가 고민할 일은 아니다. 당신이 썸을 타는 중이라면,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도 구애 전략이 된다(취향이 아주 독특한 파트너에게만 시도하시길). 아니나 다를까 밀러는 스토리텔링과 음악과 미술과 유머감각도 구애 전략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태초에 썸이 있나니.

벚꽃엔딩이 차트에 보이고 청첩장이 다섯 장씩 쌓인다. 봄이다. <연애>는 짝짓기 전략의 진화 궤적을 짚으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던 상대 성의 패턴을 심지어 예측까지 하게 해 준다. 읽고 나면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기분이다. 언제까지 여자가 화성에서 남자가 금성에서(반대였던가?) 왔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할 수는 없잖아. 이 책은 과학자가 썼지만 과학책이 아니다. 썸타는 당신을 위한 전략교본이다. 글쎄 농담 아니라니까.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썼다. 2014년 11월부터 사회 기사를 쓴다. 농땡이를 보다 못한 조직이 발로 뛰는 부서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확하다.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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