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성의 인문고전 독법, 믿을 수 있을까

2015.06.15

인문고전 독서 멘토로 불리는 저술가 이지성은 최근 자신의 2010년작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의 증보판을 내며 ‘이건희의 생각 시스템을 만든 도서목록’, ‘삼성 가문 100년을 만든 인문학 독서법’이라는 부록을 추가했다. 이들 부록에서 그는 아버지에게 “[논어] 한 권을 물려받은 것 외에는 없다”고 말하는 이건희를 인용하며 “이는 곧 [논어]를 모르면 삼성가와 이건희의 성공비결을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 논리의 점프를 채워주는 것은 직접 [논어]를 읽고 느껴보고 그것도 기왕이면 자신의 팬카페 폴레폴레의 대전 지부 회장 정진수가 쓰고 자신이 감수한 [생각하는 논어]를 읽어보라는 제언이다. [논어]의 철학이 어떻게 삼성 경영에 실천적으로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사례나 인문 독서 전문가로서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이지성이 인문 독서를 주제로 쓴 저서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공백이다.

[꿈꾸는 다락방],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라는 자기개발서로 스타 저자가 된 그는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통해 이러한 자기개발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인문고전 탐독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각 분야의 대표적인 천재치고 인문고전에 깊이 빠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으며, “누구든지 자신의 두뇌를 지금보다 몇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시키고자 한다면, 나아가 천재의 영역에까지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설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놀라울 정도로 이에 대한 증명이 없다. 그저 “인문고전을 한 권씩 철저하게 떼는 일이 미국의 명문 중고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조지 소로스 등 현대 사회의 부호들도 인문고전 애독가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할 뿐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었으니 그들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인문고전 독서 덕분이라는 논리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안일하다면 인문고전 독서를 열심히 하면 이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은 더더욱 비약적이다. 후진국이 인문고전 독서와 거리가 먼 것에 대해 지배계급의 의도를 증거도 없이 의심하는 부분에선 프리메이슨이 등장해야 할 것만큼 음모론의 향기까지 풍긴다. 현상에 대한 올바른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성실하게 작성해가는 것이 인문학의 태도라면, 이지성이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인문고전을 다루는 방식은 철저히 반-인문학적이다.

물론 이러한 허점을 이지성 본인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올해 3월에 낸 [생각하는 인문학]은 말하자면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대한 비판적인 피드백에 대한 대답에 가깝다. 무조건 열성적이고 탐욕적으로 독서하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그는 이제 단순히 공부하는 인문학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인문학을 강조한다. 이것은 유의미한 전환이다. 전작에서 사색을 “마음과 영혼으로 읽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얼버무렸던 그는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사색을 해당 고전에 대한 다각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한비자]를 읽은 뒤 [논어]의 관점에서 사색해보라”는 것은 해당 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자기만의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유용한 팁이다. “인문학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 역시 인문학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자기개발서 저자로서의 그는 [리딩으로 리드하라] 전반에 깔린 복음의 서사와 결별하지 못하며 “우리나라 3대 기업의 창업자들은 뇌의 7, 8퍼센트 정도를 썼을 거”라는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속설에 기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또다시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의 성공과 등치시켜버린다.

인문학이 자기개발과 어울리지 않는 학문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지성이 종종 인용하는 [대학]의 ‘수신제가’는 명백히 자기개발의 언어다. 진중권 역시 [현대미학강의]에서 그리스 고대철학을 존재미학으로 규정하며, “인간이 진정으로 살려면 삶에 스타일을 주어 그것을 존재의 상태로 끌어올려야 했다”고 말한다. 다만 이것은 말 그대로 내가 오직 나로서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단계의 고전 독서가 “인문고전 저자들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인문학”이라는 [생각하는 인문학]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생각하는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중요한 건 그들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전이라는 텍스트에 부딪혀 자신만의 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에 대항해 순수이성의 능력을 확립하려 했으며, 헤겔 역시 칸트의 초역사적 인간 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본인의 역사철학을 확립했다. 이지성도 칸트 독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칸트 철학이 발붙인 뉴턴 물리학을 무너뜨리는 것을 좋은 사례로 들지만, 별다른 논거나 사유의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없이 이를 너무 쉽게 칸트처럼 사유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인문학 독자는 칸트를 통해 꼭 칸트에 이를 필요도 없으며, 그렇다고 꼭 헤겔이나 아인슈타인에 이를 필요도 없다. 앞서의 경우처럼 독서란 저자가 의도한 단 하나의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질문과 해석 그리고 창조적 오독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인문학 독자로서의 스티브 잡스가 증명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잡스만의 일관된 스타일로 디자인했다는 것이지, 여기에 수많은 우연과 재능이 곁들여 만들어진 아이폰이라는 결과물을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지성의 인문고전 독법은 자아 개발로서의 인문학과 성공 서사로서의 자기개발을 억지로 연결하며 만들어진 무리수에 가깝다. 거의 모든 무리수가 그러하듯, 무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또 다른 무리한 주장이다. 그는 인문고전 독서로 우리 역시 천재가 될 수 있다면서 대신 독서를 자기 자신보다 중요하게 여긴 정약용처럼 독서할 것을([리딩으로 리드하라]), 소크라테스처럼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 사색할 것을([생각하는 인문학]) 주문한다. 여기서 인문학과 개인의 성공 서사를 연결시키려던 흥미로운 기획은, 안 되는 건 결국 네 의지박약 때문이라는 흔한 자기개발서의 변명 혹은 힐난으로 귀결되어버린다. 물론 그의 책을 읽고 데카르트, 칸트에게, 그리고 공자와 한비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듯 중요한 건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읽음으로써 깨치는 것이다. 이지성은 성공 서사라는 당의정을 입혀 인문학을 판 게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신형 당의정을 입혀 성공 서사를 팔았다. 그는 자기 저작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하지만, 그 방향 어디에 인문학적 사유와 실천이 있는가. 혹시 모르겠다. 그가 의도한 손가락이 이러한 이지성 비판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라면, 그는 제법 훌륭한 인문학 저자일지도.

글. 위근우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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