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사와 리쿠], 아이가 인간이 되는 방법

2015.11.12

* [아이사와 리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슬픈 듯한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뜨거운 눈물을 눈동자에 고이게 할 수 있었다.’ [아이사와 리쿠]의 주인공, 도쿄에 사는 열네 살 리쿠는 얼핏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괴물’처럼 보인다. 울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에는 정확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는 슬픔뿐 아니라 모든 감정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남들이 보지 않으면 울음도 의미가 없다고 믿으며, 같은 반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됐다는 친구의 말에는 구역질을 느낀다. 부모에게 배운 대로 강아지나 고양이, 새와 같은 동물들이 자신에게 세균을 옮긴다고 생각하며 혐오하기도 한다. 슬프다는 게 뭐지? 귀엽다는 건 뭐니? 리쿠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그저 생각이 감정을 지나치게 앞서 웃자라버린 아이일 뿐이다. 완벽주의로 자격지심을 가려둔 엄마와 바람을 피우며 애정결핍을 감추고 있는 아빠, 그 사이에서 리쿠는 좀처럼 솔직해지지 못하는 어른들의 못난 마음을 일찌감치 눈치챈다.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에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야.” 요약하자면 [아이사와 리쿠]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소녀에 관한 만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무난했던 아이들도 십 대의 어느 순간부터 말수는 줄고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대신 사춘기니 질풍노도의 시기니 하는 딱지만을 쉽게 붙인다. 작품이 섬세하게 헤아리는 것은 보통 ‘사춘기 소녀의 성장통’ 쯤으로 뭉뚱그려지는 아이의 구체적인 속내다. 리쿠는 부모가 이끄는 대로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유기농 음식만 먹으며 자라왔지만, 무균실 바깥의 세상은 부모에게 배우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부모는 그에게 마음껏 경험해보라고 말하는 대신 상처 주기와 과한 보호를 반복하며 은연중에 자신만의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강요한다. 부모가 안내해준 길만을 따라온 아이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다듬는 과정은 생소하고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부모의 기분을 짐작하는 데 몰두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려는 리쿠가 정말로 무관심한 건,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다.

그래서 사춘기의 징후라 불리는 갑작스런 변화는 실상 어른과 어린이, 부모와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이들의 구조 요청 신호다. 그들은 반항아가 아니라 낯선 세계에 의도치 않게 뚝 떨어뜨려진 조난자다. ‘나이 따위 먹고 싶지 않은데.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보내지고 알고 싶지 않은 일을 알게 되고 (중략) 시간이 단지 흘러갈 뿐인데도 나이를 먹으면 갑자기 내쫓긴다’는 리쿠의 독백처럼, 세월은 어른이 될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아이들의 등을 끊임없이 떠민다. 어른이 된다 해도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보장은 없으나, 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잔인하게도 오로지 아이들 각자의 손바닥에만 쥐어진다. 부모 없이 홀로 머물게 된 간사이의 고모할머니집, 리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나간다. 체육에 제법 소질이 있다는 사실도, 약간은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꽃무늬 스커트를 의외로 좋아한다는 사실도 모두 이곳에서 배운다. 학습된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진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때론 당황스러운 경험이지만 한편으로는 성장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리쿠는 ‘간사이는 이상한 곳’이라는 엄마의 시선을 걷어내고 비로소 자신의 눈으로 고모할머니 가족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넘치는 웃음과 쓸데없는 수다 뒤에는 다가오는 비극을 필사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슬픔은 반드시 눈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무리 무거운 감정이라 할지라도 오직 혼자서 감당해내야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쿠가 죽음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어린 사촌동생 도키오와 통화를 하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달려가 처음으로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사와 리쿠]의 엔딩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장면이다. 작품 속에는 이것이 뒤늦게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마주하게 된 기쁨의 눈물인지, 돌이킬 수 없이 어른의 길에 성큼 들어섰음을 깨달은 데 대한 눈물인지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그렇게 힘들게 어른이 돼도 여전히 미숙할 수 있거니와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으며, 어쩌면 성장통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데서 해소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시작된다. “어른이 돼서도 결국 끊임없이 찾아 헤맬 것 같다”는 리쿠의 예감은 결국 맞아떨어질 것이다. 다만, [아이사와 리쿠]는 그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어딘가 균형이 어긋난 듯한 인간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 호시 요리코의 전작 [오늘의 네코무라 씨]는 세상사라고는 모르는 순진한 고양이 가정부가 감정을 속이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이야기였다. [아이사와 리쿠]에서 리쿠를 각성하게 만든 것은 삭막한 도쿄가 아니라 다정다감한 사람들이 있는 간사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를 ‘힐링’해줄 대척점을 ‘순수한 무언가’로 상정하는 호시 요리코의 태도는 다소 안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이사와 리쿠]가 일본에서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수상하고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건, 한 명의 인간이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성실하게 탐구해냈기 때문이다. 냉소 혹은 무조건적인 낙관의 시선을 보내는 대신 각자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껴안는 방식으로. 키 몇 센티미터, 몸무게 몇 킬로그램 같은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성장의 순간이, 투박한 연필선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 황효진
교정.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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