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가을], 우리의 삶은 대단치 않다

2016.04.01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해서 개봉되면 빼놓지 않고 본다. 언젠가 마블이 개봉예정작을 모아 발표하던 날, 이토록 허황된 영웅의 이야기에 매료된 까닭을 고민해봤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부분 이 땅에서 싸운다. 큰 정의를 위해서든 자신만의 정의를 위해서든 지구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자꾸 지구 위에서 싸운다. 그때 스크린 앞 어두운 의자에 앉아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은 ‘낯설고 화려한 절망’이다. 그들의 환상적인 힘 반대편에 나의 무력함이 있다. 그들의 전설 맞은편에 나의 무기력한 생활이 있다. 나를 구해주겠다고 하지만 실은 이 세계에서 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우울을 극복하는 길은 더 화려하고 더 강력한 비현실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뿐이다.

만화가 겸 판화제작자 존 맥노트의 [가을]은 개인의 지루한 생활을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그림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판화라는 제작방식과 절제되어 사용되는 색의 정취로 생기는 착시에 가깝다. 오히려 그는 조금 잔인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냥 들여다본다. 주인공에게 주인공다운 대사 하나 주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 하나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실로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극적인 일은 단어 그대로 ‘극’에나 있고 나의 생활은 언제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움직인다. 존 맥노트는 뻔하디뻔한 삶의 대단할 것 없는 시절을 그리면서 두 가지 장치를 설정했다.

하나는 정해진 규격대로 움직이는 칸을 영상 프레임처럼 사용한 것이다. 규칙적인 프레임이 카메라처럼 흐르면서 무의미한 장면들로 컷이 낭비된다. 병원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어떤 환자가 어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누구였는지 묻기 전에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로 한 컷 전체를 채운다. 그 무의미한 낭비가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무심히 채워지는 장면들로 독자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관찰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또 한 가지 장치는 주인공의 행동 사이사이 강하게 대비되는 자연․사물․매체 들이다. 압도적인 장면, 부자연스럽게 반짝이는 병원 바닥, 아름다운 노래와 늘 최고와 대박을 말하는 텔레비전, 대단한 운명이 걸린 게임, 단정한 건축물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굉장하고 나는 영웅도 악당도 아닌 채로 지루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의도적인 대비를 통해 그의 만화는 쉬운 위로와 어려운 겁박의 경계 정중앙에 위치한다. 우리 모두 빛날 자격이 있다는 말도 필요 없고 이제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말도 필요 없다. 굵직한 말은 가느다란 나를 포용할 수 없다. 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척하는 극단적인 명대사에는 재빨리 박수를 쳐주고 내 공간으로 돌아와 지루함 속에 쌓인 겹겹의 장면을 관찰하자. 어제와 오늘의 아주 세밀한 차이, 삶의 정체와 중요한 문장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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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입니다. 무명의 쓰는 사람. 책방 유어마인드와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운영합니다. [책등에 베이다]를 썼고, 아직 이것이 그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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