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그룹 극한 직업│① GIRL IS NOT A DOLL

2016.06.28
지난해 12월, [아이즈]는 Mnet [프로듀스 101] 예고 무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사를 냈다. ‘[프로듀스 101], 2016년은 더 지옥일 거야’. 그리고 딱 반년이 지난 지금, 이것은 걸 그룹 시장에 대한 불길한 예언처럼 읽힌다. 시장이 불황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프로듀스 101]을 통해 ‘꿈을 꾸는 소녀들’의 서사를 품고 데뷔한 I.O.I와 역시 같은 방송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식스틴]으로 데뷔한 트와이스, 초기 소녀시대의 느낌을 재현한 여자친구 등의 등장으로 간만에 이 시장은 엔터테인먼트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 소위 ‘아재팬’의 유입과 함께 팬덤의 전체 크기 역시 더 커졌다. 하지만 이처럼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걸 그룹이 지난 반년 동안 겪어야 했던 일들을 짚어보자. 지난 1월 트와이스 멤버 쯔위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인터넷 방송에서 대만 국기를 흔든 것 때문에 사과 동영상을 찍어야 했다. KBS는 설 특집 프로그램 [본분 금메달]을 통해 걸 그룹의 본분인 이미지 관리를 얼마나 잘 하는지 확인하겠다며 걸 그룹의 몸무게를 공개하고 모형 바퀴벌레로 놀라게 했다. 온스타일 [채널 AOA]에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설현과 지민은 이후 쇼케이스에서 눈물의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엔 걸 그룹 멤버들이 잘 먹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하는 JTBC [잘 먹는 소녀들]이 방영을 앞두고 있다.

사후적인 구성일지도 모른다. 앞서의 기사는 사실 걸 그룹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지옥이란 표현을 쓴 건 “다른 참가자들을 어떻게든 떨어뜨리는 것은 필수”인 “더 힘센 쪽에서 만든 이 [헝거게임] 같은 경쟁의 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헝거게임] 같은 각자도생의 게임이 문제인 건 모두가 공평하게 이 지옥에 참여해서만은 아니다. 모두가 각자 살아남아야 할 때 더 많은 짐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결국 약자다. 딱히 내 잘못이 아니어도 사과해야 하고, 큰 잘못이 아니어도 백배사죄해야 하고, 웃으라면 웃고, 먹으라면 먹어야 한다. 이들 사건과 별개로 SBS [백종원의 삼대천왕]이나 JTBC [아는 형님] 같은 프로그램에서 걸 그룹 멤버들을 불러 예쁜 배경처럼 활용하는 것은 현재 방송 시장의 계급도에서 걸 그룹이 속한 위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MC 김성주는 게스트인 트와이스의 정연과 쯔위, 피에스타의 차오루를 이렇게 소개했다. “제작진이 (셰프들을 위한) 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손님이 아닌, 선물.

물론 아이돌 산업은 기본적으로 판타지라는 재화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유지한다. 얼마 전 KBS [해피투게더 3]에 I.O.I와 함께 출연한 S.E.S 출신의 바다는 “걸 그룹 자체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존재”라고 말하며 I.O.I를 격려했다. 하지만 바다의 속 깊은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날 방송은 의도치 않게 보이 그룹과는 다른 걸 그룹만의 기묘한 잣대를 드러냈다. 해당 방송의 제목은 ‘옛날 언니 VS 요즘 동생’이다. 대결 구도가 문제인 건 아니다. 보이 그룹은 데뷔할 때도 오빠이고, 젝스키스처럼 십수 년 만에 재결성을 해도 오빠다. 오빠는 나이가 아닌 계급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보이 그룹은 명맥을 유지한다면 오빠이자 말 그대로 우상(idol)일 수 있다. 걸 그룹은 다르다. S.E.S가 그러하듯 그들은 요정에서 어느 순간 탈락하며 옛날 언니가 된다. 그 자리는 요즘 동생이 채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아이돌 시장의 역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수많은 오빠들을 누적해왔지만, 반대로 수많은 요정을 탈락시키고 그 자리에 더 어리고 더 귀여운 존재들을 채워 넣었다. 적용되는 경쟁의 규칙 자체가 다르다. 살아남기 힘들수록, 감내해야 할 것은 더 늘어난다.

[프로듀스 101]의 국민 프로듀서 시스템 이후 대거 ‘아재팬’이 유입되고 걸 그룹에 대한 팬덤의 간섭이 심해진 건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신호다. I.O.I 데뷔가 확정되자 DC인사이드의 김세정 갤러리에서 그를 위한 소위 ‘조공’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비싼 거 쓰면 버릇 나빠진다”고 여론을 모은 건 유명한 일화다. 러블리즈는 지난 3월 한 대학 행사에서 이벤트에 당첨된 남성의 기습적인 강제 포옹을 당했으며, 에이프릴은 5월에 방영한 국방TV [위문열차]에서 한 군인이 동의 없이 허리에 손을 두르는 걸 참고 브이를 그려야 했다. 바다의 말처럼 걸 그룹은 행복과 기쁨을 주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들에게 세상은 위문열차 같은 무대다. 이것은 서로 합의된 시장의 본질이다. 문제는 이 위문열차에 마음대로 난입해도 된다는 믿음, 그럼에도 걸 그룹은 순종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나마 체계화된 작업인 방송에서조차 그들이 아저씨 방송인의 애교 자판기처럼 활용되는 상황에서, 이 뒤틀린 믿음으로부터 걸 그룹을 지킬 정서적 안전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지금의 걸 그룹은, 아이돌이 아니다. 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동경받기 위해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웃어야 한다. 연예계는, 특히 아이돌 시장은 당사자들의 수많은 감정노동으로 지탱되고 있지만 걸 그룹은 유독 그 노동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 아니 존중받지 않는 것이, 지금 이 극한 직업의 본질이자 그들의 역할이 되어버렸다. 기브 앤드 테이크의 세상에서 그들이 받아들인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남으면 행사와 광고로 적지 않은 돈을 벌 수도 있다. 그거면 된 걸까. 안전망 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혹은 무엇이든 포기해도 된다고 말하는 세상은 과연 지옥 같지 않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6년이 딱 반이 흐른 지금, 소녀들이 경험하는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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