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경 “35주년 때는 꼭 모노드라마를 해보고 싶어요”

2016.07.27
자신이 걸어온 길이 그대로 역사가 되는 사람이 있다. 고미경은 그런 인물이다. 서울예술단 창단 30주년을 맞아 그를 만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올해로 뮤지컬을 시작하신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서울예술단과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으셨나요.
고미경
: 1987년에 들어왔으니 29년째예요. 북한의 피바다 가무단에 버금가는 단체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1986년에 만들어진 게 88서울예술단(서울예술단의 전 명칭)이에요. 1기 때는 무용단원만 있는 단체였는데 그다음 해 대대적으로 단원을 모집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시립뮤지컬단에서 뮤지컬을 시작했거든요. 보다 더 도전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서 지원했고, 그때 들어오게 됐죠. 전체로는 2기고 뮤지컬팀으로는 1기예요.

경희대 성악과를 졸업하셨는데, 지금도 클래식 전공자가 뮤지컬을 하면 종종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고미경
: 다른 거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시대여서 거의 내놓은 자식이었죠. (웃음) 아주 어릴 때부터 노래를 했는데도 무대에서 노래만 부르는 오페라만으로는 충족이 안 됐어요. 학교에서 응원단도 했고, 밖에서는 콘서트 같은 것도 하면서 좀 더 대중적인 노래를 했어요. 아마 이런 활동을 조용히 하지 않았더라면 제적 얘기까지도 나왔을 거예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딸 다섯을 어렵게 키우셨는데도, 다행히 제가 뮤지컬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정말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밀어주셨어요.

지금처럼 수백 편의 뮤지컬이 공연되지 않을 때였을 텐데 뮤지컬은 어떻게 접하셨나요.
고미경
: 대학교 2학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포기와 베스]라는 작품을 봤어요. ‘오페라는 너무 갑갑해’라고 생각했을 때인데 그 작품을 보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뮤지컬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노래랑 춤이 같이 있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뮤지컬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발레랑 현대무용 등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느껴지는 감정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으셨나 봐요.
고미경
: 밖으로 끼가 드러나는 성격은 아닌데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더듬어 올라가면 친할아버지가 고한승 씨라고 아동문학가이자 우리나라에 연극을 들여온 극예술연구회 회원이셨어요. 극예술연구회에서 연출도 하시고 당시엔 여자들을 무대에 세우지 않아서 남들이 여자 배역까지 모두 연기를 했었는데 그렇게 무대에 서신 적도 있어요. 아버지도 음악을 좋아하시긴 했지만 전공하지 않으셨고, 가족 중에 배우를 하는 사람도 없거든요. 제가 배우가 된 건 할아버지의 영향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빠가 “우리 미경이 커서 뭐가 될까?”라고 하면 엄마는 “우리 미경이는 가수가 될 거야. 나가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실 정도로 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대요.

어머니 혼자 힘으로 꾸준히 성악을 시키기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고미경
: 아버지가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엄마 나이가 서른넷. 저는 둘째였는데 여린 언니가 있었고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는 상황이어서 집안의 아들 같은 존재였어요. 저는 성악을 했고 우리 언니는 또 그림을 그렸어요. 우리 엄마 장한 어머니상 드려야 하는데. (웃음) 너무 죄송한 게, 내가 좀 더 유명한 배우가 됐다면 우리 엄마에게 장한 어머니 상을 드릴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늘 가슴 한켠에 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가 노래를 멈추지 않고 배우의 길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엄마가 끝까지 밀어주셨기 때문이에요.

단체를 나왔더라면 좀 더 유명한 배우가 되었을까요?
고미경
: 몇 번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은 단원들이 밖에서도 작업을 하지만 예전에는 못 하게 했었거든요. 처음 들어와서 3년, 5년쯤 됐을 때는 젊은 마음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공연을 하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관단체 느낌이 나는 공연을 했으니까 갑갑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엄마가 나를 어렵게 키웠다고 돈을 많이 버는 배우가 되고 싶은가?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은가? 내가 되고 싶은 배우는 어떤 거지? 얼마든지 단체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고미경이 나오는 공연이라면 좋은 작품이지’ 같은 이야기를 듣고 관객들이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과 함께 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작품마다 다른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내가 원하는 부분과 잘 맞는구나 싶었어요.

배우의 성장을 관객이 꾸준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래된 단체의 장점이죠.
고미경
: 계속 똑같은 걸 내놓으면 소진이 되니까요. 더 이상 관객들에게 보여드릴 게 없어지는 그런 상태는 되고 싶지 않아요. 계속 새로운 것 익히고 배워서 이 모습, 저 모습 보여드리다 보면 저도 더 큰 배우가 되겠죠. 그동안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선생님들, 선배님들을 다 여기서 만났어요. 1990년에 했던 [백두산 신곡]은 김성녀 선생님이 주인공에 손진책 선생님이 연출을 맡고, 국수호 선생님이 안무를 해주셨어요. 이윤택 선생님도 같이 했었고. 만약에 제가 프리랜서 배우였다면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웠고 만나야 할 분들을 만났어요.

서울예술단에서 고미경이라고 하면 [바람의 나라]의 혜압이나 [잃어버린 얼굴 1895]의 진령군 같은 강하고 신비로운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요. 올 6월에 공연된 [국경의 남쪽]에서는 탬버린 연주를 비롯해 코믹한 연기를 보여주셔서 놀랐어요.
고미경
: 사실 저라는 사람 자체는 굉장히 유쾌해요. [바람의 나라] 혜압 이후에 강하고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런 역을 많이 했지만, 과거에 저를 행복하게 했던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모두 희극배우로서 무대에 섰을 때거든요. [태풍]의 광대 트린큘러 같은. [국경의 남쪽]에서도 남으로 넘어온 가족들이 라이브 식당을 열고 ‘반갑습니다’를 부르는 신이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키보드를 칠 수 있었거든요. 근데 키보드면 뭔가 한계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관객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고 싶다. (웃음) 그래서 나온 게 탬버린이었어요. 그 장면을 보면 제가 노래방에서 많이 놀아본 것 같잖아요? 사실 저한테는 노래가 일이다 보니 노래방을 안 가요. 세계의 탬버린 영상을 찾아 보고 만들어낸 거예요.

주로 강한 캐릭터가 주어지는 이유가 있을까요?
고미경
: 제 보이스톤이나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찾다 보니 그렇게 중심을 잡아주는 무거운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강한 어머니 밑에서 전체적인 것을 아우르며 자란 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고요. 어릴 때부터도 친구들 한데 모으고 앞장서는 그런 성향이 있었거든요. 1998년에 [애니깽]이라는 작품을 했는데 거기서도 칼을 휘두르며 멕시코 농장주를 죽이는 아주 강한 조선 여자를 연기했었어요. 딸을 임신한 상태였는데.

딸은 강인한 여성으로 자랐나요? (웃음)
고미경
: 다른 엄마들은 태교도 따로 하는데 저는 누군가를 죽이는 연기를 했으니까 공연 연습하기 전에 항상 배에 손을 대고 그랬죠. “얘야, 엄마는 배우라서 지금 연기를 하는 거란다. 너도 이 엄마와 함께 연기를 하렴.” (웃음) 당시에는 임신 초기라 성별을 모를 때였는데 남자든 여자든 세상을 밝게 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아이였으면 해서 밝을 오 밝을 소로 이름을 지었어요. 다행히도 아주 건강한 딸을 낳았죠. 정말 밝고 해피해서 너무 감사해요. 뭔가 비장하고 시리어스한 아이가 태어났다면 아마 내가 이런 공연을 해서 그런건가 하고 많이 걱정했을 것 같아요.

30년간 배우와 여성의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으셨겠어요.
고미경
: 대학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여배우는 결혼을 안 하는 독신녀든지 이혼녀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공동 작업이라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되는데 가정이 있으면 되겠냐라는 얘기셨거든요. 그 말이 가슴에 많이 남았어요. 난 내 일과 가정의 중심을 모두 지키고 싶은 여자였으니까. 혼자 지내는 배우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 오롯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들을 보면서 속상하기도 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으면서 배우로서 훨씬 더 성숙해졌다고 생각해요. 우리 딸은 연습 상대역을 해주기도 했지만 사실 너무 모진 엄마였거든요. 어릴 때는 그게 너무 미안했는데 크고 나니까 무대에 선 엄마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굉장히 행복해하더라고요.

그동안 60편 이상의 작품을 공연했는데, 혹시 다시 올리면 좋을 작품들이 있을까요?
고미경
: [애니깽]이 그랬고요. 1987년, 서울예술단 첫 뮤지컬이었던 [한강은 흐른다]도 굉장히 좋아요. 유인촌 선생님이 주인공이셨는데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았던 한국 사람들의 애환 같은 게 그려진 작품이었어요. 1991년에 공연된 [영혼의 노래]는 홍난파 선생님의 일대기로 만든 거라 아름다운 가곡들이 뮤지컬넘버로 들어와 있어서 그 작품은 참 아깝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건 1992년에 무대가 무너졌던 [꿈꾸는 철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어느 날 무대가 폭삭 무너져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야 된다는 걸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물론 신문에 쫙 속보로 떠서 작품은 대박이 났지만. (웃음)

해외 원작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창작뮤지컬 작업에만 거의 30년을 보내신 셈인데요. 라이선스 뮤지컬에 대한 고민은 없으셨나요.
고미경
: 아주 친한 친구가 뉴욕에 있어서 공연을 많이 보는 편인데, 가서 보면 춤도 굉장히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무대도 막 샥샥 바뀌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런 거 보면 와 멋지다! 이래요. 그런데 언어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전체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감동을 받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감동을 받는다면 저 사람의 노래, 저 춤 이런 식이더라고요. 정서적으로 달라서 그런 건지. 저는 우리가 감동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더 하고 싶어요. 서울예술단에 있으면서 그런 작품을 해야 된다는 생각도 더 깊어진 것 같고. 우리 것만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8월 9일부터 공연되는 [놀이]는 기존의 서울예술단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특히 스페인 플라멩고 선생님 역을 맡으셔서 한국어를 안 쓰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고미경
: 그동안은 주로 드라마가 있고 노래나 춤 위주의 창작뮤지컬 스타일의 작품을 했는데, [놀이]는 악기 연주가 더 중심이 되는 퍼포먼스예요. 게다가 서울예술단은 매년 작품을 4개 정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전혀 다른 스타일이니까 올해 죽었구나 싶었죠. 하하하하. 플라멩고나 발리의 악기 가믈란을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저는 순수창작물만 고집해왔던 배우인데 스페인어로 연기한다는 게 사실 부담스러워요. 제가 맡은 역은 그렇지만, 서울예술단이 만드는 작품이니까 우리 고유의 색이 담겨서 괜찮지 않을까요. (웃음)

서울예술단은 어떤 색일까요?
고미경
: 하얀색. 모든 색이 다 들어올 수 있어요. 서울예술단은 무엇이든지 가능한 곳이거든요. 도화지 같죠.

단체와 개인이 동시에 30주년을 맞이하게 됐는데요. 더 해보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가요?

고미경
: 아주 강하거나 아주 웃긴 극대화된 연기는 많이 해봤으니까 자애로운 어머니를 해보고 싶어요. 제가 가진 모습이지만 무대에서는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처음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해주는 팬이 계세요. 그 친구가 지난번에 그러더라고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인해주신 것들 다 가지고 있으니 전시 한 번 하자고. 이번에는 못 했지만 35주년에는 꼭 모노드라마 하고 싶어요. 그때는 그 친구가 가진 자료들로 전시도 하고요. 그런 친구들이 있기에 제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20년간 옆에서 제가 하는 거 다 지켜봐준 남편도 죽기 전에 꼭 무대에 함께 서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말하는 거 보면 거의 자기가 배우거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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