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 “보호받는 것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역할이 더 재밌어요”

2016.08.10
아이비라는 이름에서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다 지울 필요가 있다. 아이비 혹은 박은혜는 모두의 상상 속에 있으면서도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위키드]를 여러 번 보고서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다면서요?
아이비
: 내한은 두 번, 한국어 프로덕션은 옥주현-정선아 페어로 한 번, 세 번이나 봤는데도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그냥 너무 멋있다! 대박! 소오름! 이런 상태. (웃음) 뮤지컬계의 최고 여왕님들이 하셨던 공연이고 특히 글린다 같은 경우에는 뮤지컬에서 쓰는 거의 대부분의 발성을 쓰는 역이라 더 그랬어요. 지금도 엘파바가 ‘Defying Gravity’를 부르면서 하늘로 올라갈 때서야 실감해요. 엘파바를 우러러보면서 내가 어마무시한 작품에 출연하고 있구나.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요. 자신감이 되게 넘쳐 보이지만 저 사실 진~짜 많이 떨어요. 오디션도 그렇고 첫 무대 설 때도 청심환 없이는 안 돼요. 제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라는 걸 뮤지컬 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럼 글린다 역에는 어떻게 도전하게 됐어요?
아이비
: 작년에 [유린타운]을 했었는데 그 캐릭터가 예쁘고 백치미 있는, 약간 글린다의 전신 같은 인물이었거든요. 성악 발성도 쓰고. 선배님들뿐만 아니라 보러 오는 사람들마다 다 글린다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응? 왜? (웃음) 그런 얘기들을 듣다 보니 ‘한번 해봐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변에서 용기를 많이 북돋아주셨어요.

[키스 미 케이트]나 [유린타운]을 본 관객들이라면 아이비의 글린다가 아주 낯설진 않을 텐데, ‘아이비’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 놀라는 것 같아요.
아이비
: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잖아요. [시카고]를 워낙 오래하기도 했고. 오디션 때도 연출님이나 음악감독님이 이렇게까지 준비해 올 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몇 년간 뮤지컬을 했어도 다작을 한 것도 아니었고 어쨌건 가수라는 타이틀이 있다 보니 제 스펙트럼을 좁게 보셨을 수도 있어요. 열심히 준비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좋았죠.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서우면서도 신기하죠.
아이비
: 그래서 저는 엘파바를 보면서 공감을 참 많이 해요. 저야말로 선입견 덩어리였으니까. 그냥 가수도 아니고 무슨 섹시 스타 이런 거였잖아요. (웃음) 후반부에 ‘For Good’ 부를 때도 그동안 엘파바 놀렸던 것들 때문에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눈물이 나요. 요즘은 [위키드]를 잘해내서 ‘나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잘할 수 있어! 더 많이 할 수 있어!’라는 걸 공연계에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어요.

관객 입장에서 작품을 볼 때와 직접 연기를 해보니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아이비
: 처음에는 외적인 것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예쁜 의상에 화려한 조명을 받는, 약간 바비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런데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엘파바보다도 더 어려운 여정을 걷는 게 글린다가 아닌가 싶어요. 백치미 속에 굉장히 순수한 면이 있거든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야 되나? 동정심도 많고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도 많고. 그런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한 번밖에 못 보실 테고 친구를 배려했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오즈의 통치자로 남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냥 평면적으로 예쁜 애, 이기적이고 얄미운 캐릭터로 보일 수가 있어요. 얄밉게 생겨서 (웃음) ‘What Is This Feeling?’ 이런 데서 조금이라도 오버하면 ‘어머, 쟤 얌체 같애’ 이렇게 생각하실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럼 글린다의 정수는 어떤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비
: 어쨌건 끝까지 사랑스러워 보여야 해요. [시카고]의 록시도 그랬어요. 살인자에 나쁜 여자지만 관객들이 이 여자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얼마 전에 남경주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대본 안의 글린다가 이미 사랑스럽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대로 배우가 소화해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배우 욕심으로 자꾸 뭘 더 넣고 개그 욕심이 생기면 생길수록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다. 그냥 진실되게만, 해야 할 것만 단순하게 표현하면 된다.” 너무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 말씀에 충실하려고 해요.

개그 욕심이 많은 편인가 봐요. (웃음)
아이비
: 얼굴 근육이 잘 사용되는 스타일이라 평소에도 표정이 다양하거든요. 개그 욕심도 많고, 사람도 같이 있으면 배꼽 찢어지는 사람이 좋아요. 그래서 커튼콜 때 막춤을 엄청 춰요. 연출님이 한 번은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 과격한 춤이나 행동은 자제해주세요”라고 공지하셨다니까요. “대놓고 저라고 얘기해주세요, 자제하겠습니다” 이랬어요. (웃음) 개그 욕심이 있어서 극에서도 종종 웃기려고 할 때가 있는데, 신기한 게 제가 오버하는 날은 관객들이 다 알더라고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너무 많고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무대에 서면 설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가수로도 오랫동안 무대에 서왔는데 같은 무대라도 여기서 느껴지는 건 또 다른가요?
아이비
: 훨씬 더 냉정하고 책임감이 느껴지는 게 이쪽이에요. 사실 가수들의 무대는 짧기도 하고, 그곳에 오는 관객들은 제 팬클럽이거나 이미 소리 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시잖아요. 여기는 비싼 돈을 지불해서 어려운 발걸음 해주시는 분들이니까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동시에 즐거움을 주는, 특별한 곳인 것 같아요.

뮤지컬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어요?
아이비
: 대학생 때는 공연을 봐도 사실 별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미스 사이공]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배우들이 개미처럼 보이는 2층에서도 오열할 정도였거든요. 그때 뮤지컬의 힘을 강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뮤지컬이 어려운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이제는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렵고, 연기가 이렇게 재밌는 건지 점점 깨달아가고 있어요.

연기의 어떤 점이 흥미로운 거예요?
아이비
: 똑같은 대사를 하더라도 변수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 것들이 쫄깃쫄깃하게 묘한 희열을 주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제가 도전을 좋아하질 않아요. 습득이 느리고 순발력이 없어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뭘 잘 못 하거든요. 경연 프로그램도 그런 이유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하고. 그런데 무대는 꽉 짜여진 틀 안에서 소소하게 달라지는 것들이 있어서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겨내는 짜릿함이 있어요.

글린다가 엘파바를 통해 성장한 것처럼, 지금의 아이비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이비
: 아무래도 최정원 선배님이시겠죠. 가장 오래 작품을 했고, 옆에서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고, 그분의 연기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정말 뮤지컬을 위해 태어나신 분 같은 느낌이 있어서 신이 내린 재능이란 저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리고 뮤지컬을 하기 전부터 저에게 뮤지컬을 보여주신 분이 (옥)주현 언니였거든요. 2008년에는 [시카고]를 (정)선아랑 같이 봤었어요. 그때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어느새 제가 [시카고]를 하고 선아랑 더블로 연기를 하게 됐어요. 이런 분들이랑 같이 공연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복 받았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신기해요.

옥주현 씨처럼 같은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선배를 보면 어때요?
아이비
: 언니의 연기, 몸에 밴 자기 관리,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모습을 보면 저도 도전하게 되고 그래요. 언니는 아이돌이었으니까 이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싶더라고요. 굳이 가수 후배가 아니더라도 언니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라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 게 아닐까요.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 몸을 단련하잖아요. 언니 하는 거 보면 하고 싶은데 운동이 너~무 싫어요. 닮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줘. (웃음) 괜히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에요. 게으름을 이겨내다니! 저는 다시 태어나야 될 것 같아요. 이번 생은 글렀어.

그럼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아이비
: 저는 돈을 써요. (울상) 그래서 돈을 못 모았어요. 벌면 버는 족족 다 쓰니까. 하아. 제일 좋아하는 게 뮤지컬이랑 옷이에요.

11월에 공연되는 [아이다]에서는 암네리스를 맡았어요. [위키드]도 [아이다]도 엘파바와 아이다가 주목받는 극인데 왜 글린다와 암네리스를 하는 것 같아요?
아이비
: 일단은 목소리 톤이나 외모가 엘파바와 아이다에 어울리지가 않아요. 저는 잘할 수 있고 잘 소화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사람이 가진 그릇이 다 다른데 저와 어울리지 않는 걸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관객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으니까요. MBC [일밤] ‘복면가왕’에 나갔던 적이 있는데 얼굴을 가려도 한 마디 부르면 다 알아요.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목소리인가 봐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해야 되는 걸 해야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상처를 딛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글린다와 암네리스가 더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어떤 인물들을 만나고 싶나요?
아이비
: [시카고]나 [위키드]처럼 러브스토리나 막장스토리 없이 여자들만의 이야기로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점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그동안 다섯 작품을 했는데 [고스트]를 빼고는 다 굉장히 밝은 캐릭터를 했어요. 성향 자체가 너무 밝아서 어두운 걸 하면 너무 진이 빠지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남자배우랑 이루어지는 건 안 될 것 같고요. (웃음) 앞으로도 연약한 모습 속에 감춰진 강인함이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해온 역할들이 그런 것들이었고, 보호받는 것보다는 항상 이겨내는 역할이 더 재밌었어요. 성격에도 잘 맞고. 마냥 예쁘기만 한 건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어요.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성장하는 여자들을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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