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선 작가 “요즘은 내 옆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2016.08.24
50년에 걸친 동성애자들의 자아 찾기, 폭력의 시대에 일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고군분투, 장애를 가진 아들의 성(性)과 안락사, 인간의 연극이라는 인생. 연극 [프라이드]부터 [햄릿-더 플레이]까지 지난 3년간 지이선 작가가 내놓은 이야기들은 그 주제가 깊고 논의의 폭이 넓은 것들이었다. 그는 빨간 풍선이나 오리 인형 같은 소품으로 극적인 상황에 일상성을 불어넣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배치하는 것으로 관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애쓴다. 누군가는 원작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그의 각색이 과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이선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딱 하나다. “관객이 이 이야기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게 하는 것.” 덕분에 한 편의 연극을 보며 생각보다 더 많은 사유를 하게 됐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올해는 윤색까지 포함해 총 네 작품이 공연됐는데, [카포네 트릴로지]가 유일한 재연작이라 상대적으로 수월했겠어요.
지이선
: 이번 [카포네 트릴로지] 첫 리딩 때 제작사에서 [로키], [루시퍼], [빈디치] 대본을 한꺼번에 묶어서 주셨거든요. 118페이지 나오더라고요. 미쳤었구나. 이 작품은 처음에 (김)태형 연출이 하자 그래서 안 한다 했고 (웃음) 작품 3개라 그래서 안 한다 했었어요. 미팅에 거절하려고 나갔는데 대표님께서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의 표정이 너무너무 기대되고 궁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마음으로 이걸 가져왔고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흔들렸어요. 각색하면서는 ‘이거 내가 왜 한다고 했지?’를 계속 말하면서도 작년에 빡세게 만들어놓으니까 이제는 약간 바이블처럼 굳어진 게 있네요.

당시 각색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작업하신 부분은 어떤 건가요?
지이선
: [카포네 트릴로지]는 에딘버러 국제페스티벌에 맞는 사이즈와 스타일로 나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정식 공연으로 올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어요. 이를테면 무대도 훨씬 구체적이어야 했고 대사나 구조도 좀 더 탄탄해야 했죠. 그런데 태형 연출이나 저나 지금 여기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대부분의 원작에 그게 없진 않아요. 저는 그 포인트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죠. 알 카포네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의 평범함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원작이 얘기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이 지금 한국에서도 되게 단순하게는 ‘관피아’부터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에서 많이 드러난다고 봤고요. 개인적으로는 극에 나오는 올드맨, 영맨, 레이디 중 레이디가 굉장히 매력적이라서 이 역을 더 강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레이디의 어떤 면이 매력적이었나요?
지이선
: 수동적이고 피해자로만 느껴지는 여성들이 능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지들이 있었어요. 카포네 이야기들은 다 총과 남자들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여성이 있음으로써 이야기가 더 풍부해질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특히 [로키]의 롤라만이 661호에서 살아서 나가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물론 거짓말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치고 사람을 죽이기도 했지만, 잡초 같은 매력이랄까? 근사한 썅년이죠. (웃음) [루시퍼]도 닉 니티라는 캐릭터가 풍부해지려면 그의 아내 말린이 끝까지 버티면서 맞서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빈디치]의 루시는 기존에 없던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에꾸눈을 만들었어요. 육체적 결함이 있는데 그걸 극복해서 오히려 아름다운, 그 결함마저 매혹적인 스타일을 갖췄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지금 현재 존재하는 굉장히 매혹적이고 퇴폐적인 마녀?

작년에도 공연을 봤는데 올해는 레이디가 더 부각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지이선
: 연습 중간에 태형 연출에게 문자가 왔었어요. [로키]의 마지막 대사를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써줄 수 있냐고. 저는 그게 너무 설명하는 거 같아서 별로 좋지 않았는데 막상 런을 가고 리허설을 보니까 넣어야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넣은 게 “혼자서는 못 나가시잖아요”라는 말에 “아니야. 아니에요”라고 하는 대사예요. 세 에피소드 중에서도 [로키]는 제일 손을 많이 본 대본이었는데, 올해는 이 여자가 얼마나 나가고 싶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괴롭힘을 당해요. 무례한 상황에서도 싸우고 거짓말하면서 어떻게든 버티거든요. 그러다 결국에는 ‘나 혼자 나가야 된다’고 각성을 하게 돼요. 물론 다른 톤이지만 나중에 루시도 “나는 ‘아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해요. 여자가 “아니요”라고 얘기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올해의 [로키]에서는 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레이디 역의 임강희 씨 공연을 여러 편 봤는데, 이렇게까지 매력적인 배우인지 미처 몰랐어요. 올드맨과 영맨을 제압하는 더 높은 차원의 여성이랄까. (웃음)
지이선
: 제가 봤을 때는 배민희(배수빈-신성민-임강희) 팀에서 강희가 힘이 제일 좋을걸요? 이 친구가 탄탄하게 딱 버티는 힘이 있더라고요. 약간 레슬링 선수 같고, (웃음) 아주 쥐락펴락해요. 그러다 보니 확실히 레이디가 훨씬 강화된 느낌이 있죠.

특별히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지이선
: 2007년에 [모범생들]을 쓰고 이거 여자 버전으로 쓰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왜 이런 얘기들이 나올까 생각하다가, 여배우들이 즐겁게 할 수 있고 이들의 다양한 카드를 제시할 수 있는 역할을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글 쓰는 걸 너무너무 싫어해서 ‘작가의 글’도 잘 안 쓰는데, 공연이 좋아서 하는 거라 배우들이 해내는 걸 보는 기쁨이 되게 커요. 제 주변에 굉장히 훌륭한 여성들이 많아요. 연극열전의 허지혜 대표님, 조명 디자인 하시는 구윤영 감독님, 다행히도 운 좋게 훌륭한 여배우들이 제 주변에 많아서 그 친구들 믿고 가는 면도 있고. 그래서 잘 쓰고 싶어요.

갈수록 창작자들의 젠더 감수성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지이선
: 최근 몇 년 사이에 제 생각이 발전된 부분이 확실히 있어요. 어렸을 때는 “너 그날이야?” 같은 농담들을 웃으면서 넘기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고 어린 여자 친구들이 그런 농담을 듣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속이 상한 거예요. 화가 나고. 친구 딸이 분홍색을 되게 좋아한다면서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분홍색 좋아하는 거 보면 여자애라서 그런가 봐”라고 하면 “너 킨더조이 봤냐? 남아용은 파란색이고 여아용은 핑크색이야. 그런 것들에 계속 노출이 되면 핑크색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게 돼요. 저보다 어린 친구들은 남녀를 떠나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지난번 이대생들이 진압봉을 든 경찰들 앞에서 서로 스크럼을 짜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동영상을 봤어요. ‘호!’ 하는 추임새도 넣던데. (웃음) 사실 저 그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지만 울컥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너무 경이롭고 대단해요. 이 친구들이 좀 더 자유로운 세상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친구들이 보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만들자’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건 어떤 사상이라든가 주의라든가 그런 문제는 아니에요. 이런 인식이 높아지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에요.

[햄릿-더 플레이]에서도 오필리어와 거트루드의 자유의지도 좋았지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대사를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으로 듣는 순간이 굉장히 통쾌했어요.
지이선
: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기본적으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입체적이고 풍부해야 주인공이 훨씬 살아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 역할도 남성이 해야만 했던 시대고 여성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때예요. 셰익스피어가 그런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런 작품을 썼겠죠. 대사에도 나오잖아요. 연극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만약 셰익스피어가 지금의 한국에 살았다면 저는 셰익스피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자 이야기를 풍부하게 잘 썼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입을 통해서 하거나. 그런 면에서 저는 지금의 관객과 만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더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대사가 너무 걸리길래 공연 일주일 전쯤 이 대사를 운명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어떤 한탄? 연민? 고통으로 돌리는 것이 맞겠다 싶어서 고쳤어요. [햄릿-더 플레이]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지점이 이슈가 되는 것을 보고 지금의 사회에서 ‘여성’이 확실히 중요하다는 걸 저도 실감하게 된 것 같아요. 오필리어나 거트루드를 주인공으로 써봤으면 하는 생각이 요즘 계속 있어요.

하지만 재창작에 가까운 각색이 과연 맞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지이선
: 사실 되게 무서워요. 왜냐면 전 셰익스피어 선생님을 굉장히 존경하지만 굉장히 싫어하기도 해요. 뭘 써도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웃음) 지금의 다양한 이야기들의 원형이 다 셰익스피어라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공포가 늘 있거든요.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고. 저에게 제일 큰 것 중 하나는 원작에 있는 메시지나 원작을 조금 더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거예요. 각색이나 연습 과정에서 원작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거나 생략하는 부분이 생기게 되는데, 저는 끝까지 원작이 갖고 있는 중요한 장면, 대사, 감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킬 미 나우]는 원작이 굉장히 드라이하고 센데 한국에서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작품이 됐어요. 그게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 가장 우선시되는 건 관객들이 작품을 오해하지 않고, 여기서 하는 얘기들에 고개를 돌리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동안 했던 작품들의 주제가 워낙 무겁고 논의의 폭이 넓어서 “관객이 고개를 돌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지이선
: 어쩌다 (배)수빈 오빠가 저랑 작품 세 개를 연달아서 했는데 어제 저한테 “네 작품 너무 힘들어!”라고 하더라고요. 원작이 힘드니까 각색을 붙이겠죠. 아니야, 제가 하면 더 힘든 것 같아요. [카포네 트릴로지]는 태형 연출이랑 제가 붙으면서 더 힘들고 더 큰 프로젝트가 돼버렸어요. 힘든 거 아는데 누가 하고 싶겠어요. 하기 싫어요. 근데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있어요. 그러면 하는 거예요. [킬 미 나우]는 대본이 너무너무 좋았지만 공간이랑 점프가 많아서 공연에 구조적인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공연은 보고 듣는 거라. 그래서 연극열전 쪽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던 상태였어요.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꼭 해야 할 것 같았어요.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믿고 갔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저한테 힘든 것만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각색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작가라면 기본적으로 스스로 창조하는 세계를 향한 욕망이 있지 않나요?
지이선
: 한국사람 이름으로 극을 쓴 게 2년 전이에요. 내년에는 할 거예요! 극작가 중에서는 좀 이르게 스물여덟에 등단을 했는데 내년이면 제가 마흔이거든요. 저는 각색과 창작을 나누면서 작업하지 않았지만, 공연 보러 오라고 했을 때 “네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가?”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공들여서 새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오리지널리티가 저한테 있는 작업도 아니고, 저에게는 이 작품이 라이선스지만 그 나라에서는 창작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창작에 대한 존중이 훨씬 커져요. 자기 작업 하는 작가들은 진짜 늘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그만큼 각색 작업을 즐거워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생각해두신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지이선
: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그런 작품들이 나타나서 각색을 한 면도 있어요. 요즘은 테러나 전쟁 혹은 내 옆에서 바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사실 [햄릿] 초고는 테러리스트 얘기로 썼었어요. 오필리어가 용병으로 나와서 나중에 지뢰를 밟고 죽는. 동연 연출님이 이건 김태형 연출님이랑 하라고 했는데 태형 연출은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시선을 갖는다면 그런 비극들은 줄어들 거라 생각하거든요. 제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뿐, 강남역에 있지 않았을 뿐, 군대에 가지 않았을 뿐, 저희 부모님이 저를 학대하는 부모님이 아니었을 뿐, 제가 고양이로 태어나지 않았을 뿐. 이런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제가 철학적이거나 사유가 깊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끊임없이 할 수 없다면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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