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덕혜옹주], ‘국뽕 영화’의 어떤 전술

2016.09.02
‘국뽕(국가+히로뽕)’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주체에 대한 폄하와 경멸의 시선이 묻어 있어서다. 올여름 극장가를 견인한 텐트폴 영화 [인천상륙작전]과 [덕혜옹주]는 [명량], [국제시장] 등에 이어 ‘국뽕 영화’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것은 확실히 불명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은 극장을 찾았다. [인천상륙작전]은 700만 명, [덕혜옹주]는 522만 명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을 일찍이 넘어섰다. [인천상륙작전]의 완성도를 향한 평단의 박한 평과 [덕혜옹주]의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봤고, 즐겼으며, 심지어 영화를 옹호하고 있다. 과연 그 많은 관객들이 애국주의적 자긍심과 도취감에 젖어 이 영화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정말 그들은 국가와 민족에 취한 것일까? 누구도 온전히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뽕’이라는 코드가 영화 시장에서 하나의 마케팅 장치로 자리 잡은 현실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명량], [국제시장] 등의 성공 이후 ‘국뽕’ 코드는 극장의 주 관객층이 아닌 중장년층을 포섭하는 호재로 작동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국’이 아닌, ‘뽕’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애국주의에 반응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찮다. 특히나 젊은 세대가 ‘헬조선’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 국가에 대한 자부가 소비로 이어진다는 것은 좀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 세대와는 달리 요즘 관객들은 영화를 프로파간다나 탐미의 대상이 아닌 쇼핑이나 놀이동산 같은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경향이 짙다. 영화적 완성도를 운운하는 것도 영화를 제작하는 주체와 그것을 파수하는 평단의 몫이지 애초에 관객의 의무는 아니다. 그들은 영화 앞에 솔직하다. 그러니 이 영화들의 성공을 애국주의의 발현으로 단순화시킬 순 없다. 분명 보이지 않는 어떤 영화적 힘이 관객을 취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들의 전술이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멜로드라마는 남녀의 사랑을 그린 작품을 부르는 좁은 의미가 아니다.

선과 악을 또렷이 가르는 도덕적 이분법, 폭력, 스펙터클, 신파성, 인과응보의 서사는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영화들의 공통적 속성이다. [인천상륙작전]을 보자. 연합군과 북한이라는 선명한 대립구조, 림계진(이범수)의 악마화, 한 소년의 소망을 위해 작전을 수행 중인 맥아더 장군(리암 니슨)의 숭고함, 그리고 숨겨진 영웅(이정재)의 고결한 희생과 정신 승리의 드라마.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비극적 여주인공의 신파다. 역사적 사실을 180도 비틀면서까지 나라 잃은 황녀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돕는다는 통속적인 극화와 정서적 과잉으로 극을 이끌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극화한다.

멜로드라마의 역사는 길다. 프랑스 인권 선언 이후인 18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멜로드라마가 번성했던 이유는 그 이데올로기적 역학이 시대적 요구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물질적으로 취약한 세계에서 타락한 귀족들을 악마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기댈 곳 하나 없이 무력하게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그 자체를 대변했다. 가난하고 착한 주인공이 부패하고 돈 많은 악인에게 핍박받지만 종국에는 승리하는 이야기. 현실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잠시나마 해방시키는 출구로서의 판타지.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지 않나? [베테랑]의 성공 이후 최근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은 ‘흙수저 대 금수저’의 서사 또한 멜로드라마를 기저에 두고 있다.

특히 멜로드라마적 갈등은 선한 인물이 통제 불가능한 힘으로부터 곤경에 빠지게 되는 데서 발생한다. 이 갈등의 프레임을 가장 탄탄하게 극화시킬 수 있는 ‘치트키’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극에 끌어다 쓰는 것이다. 최근 유독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홍보하는 영화가 많아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물며 우리에게 아직 청산되지 않은 일제 식민의 역사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만큼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갈등의 축도 없을 것이다. 또는 지금 우리에게 ‘헬조선’을 선사한 주적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라도 설정하고 형상화하고 단죄하고 싶은 욕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출구 없는 지옥을 버텨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환상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상상 속에서만큼 우리는 선한 자이고, 자기연민이 얼마든지 용납되며, 부덕이 아닌 미덕의 승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설령 기만적 행위라 해도 말이다.

누군가는 퇴행이라 부르는 이 기만적 행위를 나는 감히 비난할 수 없다. 멜로드라마의 플롯은 통제 불가능한 운명과 그 안에 놓인 개인의 무능력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위에 존재한 더 고차원적인 도덕적 힘이 여전히 지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멜로드라마가 출현했던 프랑스 대혁명 시기 시민들은 빈곤, 계급의 착취구조, 고용 불안, 주택난 등의 압박 속에서 매일을 버텨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와 놀랍도록 절묘하게 포개지는 풍경이다. 궁극적인 미덕의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재간이 없는 시대다. 적어도 ‘국뽕’이라 불리는 영화들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에 화답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조롱받기 십상인 ‘믿음, 소망, 사랑’을 설파한다. 오감으로 다가오는, 이처럼 실질적인 위로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멜로드라마는 준 종교의 기능을 수행한다. 현실에서는 패했지만 우리의 정신만큼은 꺾이지 않는다는 메시지. 여기서 터져 나오는 감동의 눈물. 마치 예배의 자리에 앉아 체험하는 의식의 흐름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뽕’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올 여름시장을 강타한 [부산행]과 [터널]의 성공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한국 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거울 비추듯 반영하면서도 현실 세계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의 싹을 틔우며 이야기를 끝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결국 현실의 불편함을 외면하는 태도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달리 말해도 결국 ‘뽕’은 ‘뽕’인 것이다. 나는 지금 개봉을 앞둔 [밀정]의 성적에 주목하는 중이다. 예상하건대 [밀정]은 어느 정도의 흥행에는 성공하겠지만, 소위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정]은 역사 이면의 개인을 조명한 영화이고, 관객의 감정을 동요시키기보다 생각할 거리에 더 관심이 많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명확히 답을 내리거나 온전히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공백에서 서성이게 만들고 각성시킨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내 예상을 깨고 이 영화가 크게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나의 답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가치 있다. 고통스러울지언정 현실 직시의 순간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역사는, 멜로드라마 속 세계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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