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석 “매 순간이 벼랑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6.09.07
책 읽어주는 남자. 무대 위의 박은석은 언제나 그렇다. 데뷔작이었던 [몬테크리스토]부터 관계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한 [노트르담 드 파리]와 첫 대극장 주연이었던 [드라큘라]를 거쳐 [페스트]까지. 박은석의 진중하면서도 따뜻한 음색과 선 굵은 외모는 관객을 그 시대로 데려가는 하나의 설정값이다. 멸종된 공룡처럼 정공법을 쓰는 그의 연기는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지는 지고지순한 사랑과 정의 같은 단어도 납득시킨다. 국가적 재앙 앞에서 자신이 맡을 일에 책임을 지는 이들을 찾기 어려운 때, 두려움을 딛고 행동하는 박은석의 리유가 반가운 이유다.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 FM에 가깝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 [페스트] 때도 소설 다 읽고 시작했죠?
박은석: 원작 팠죠. (웃음) 우리 작품이랑은 설정 자체가 다른 부분들이 있고 소설도 카뮈가 관념적인 걸 싫어해서 읽어가는 게 좀 불편하긴 했는데요. 나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같은 생각이 많이 들면서 소설 안에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재난에 저항하는 방식이 마냥 싸우자가 아니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자라는 게 ‘인간으로서 살아가자’는 이야기로 느껴졌어요. 저도 가끔씩 너무 힘들어서 포기해버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보면 늘 포기한 이후가 더 힘들었어요. 어쨌든 끝까지 버텨내면서 살아가는 게 오히려 더 힘이 되고 그것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의 숙명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신념이 굳건한 인물을 연기해야 되는 점이 쉽지 않았겠어요.
박은석:
어떤 인물이 큰 갈등을 겪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면 보는 사람들도 그 인물에 더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런데 리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념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런 사람 우리 주변에 있으면 피곤하잖아요. (웃음) 모두가 그렇게 못 살고 있으니까 반감도 갖게 되는 것 같고. 그런데 리유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에 대해서 이해하다 보니까 재밌었어요.

자연스럽게 현실이 대입되는 작품인데, 사회적 이슈에 강하게 반응하는 편인가요?
박은석:
저는 보는 사람이었어요, 무기력하게. 물론 나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 뭐 하나 믿을 수 있는 게 없고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 보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리유라는 캐릭터를 연구할 수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철학적으로 조금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고 해야 되나?

어떤 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박은석:
[페스트]는 갈등의 순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거든요. 원작을 보면 리유에 대한 설명이 많이 없어요. 페스트에 대한 기록을 리유가 작성한 거라서 그래요. 마지막에 그거 보고 이 사람 엄청 겸손한 사람이네 싶었거든요. 리유는 자신의 일에 책임지는 선택을 하는데, 연습 때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신념을 더 굳건히 하는 사람일수록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보면 리유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걸 이겨내고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더 그렇지 않았을까. 제가 만약에 진짜 리유의 입장이라면 저도 그렇게 할 것 같긴 하지만 솔직히 무서워요.

그래서인지 은석 씨가 부르는 ‘슬픈 아픔’에서는 두려움을 딛고 앞으로 가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졌어요.
박은석:
저도 두려움이 많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저만의 신념이나 방향성을 확고히 하려는 습성이 있어요. 제 단점이기도 한데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거든요. 왜 이런 성격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옛날부터 그랬어요. 최대한 머릿속에서 정리하려고 하고. 나를 만족시켜 주지 않는데도 이래요. 아마 제가 가진 이런 성격들 때문에 리유의 두려움이 더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해요.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박은석:
저희 아버지가 완벽주의적인 면이 있으신데 좀 닮은 것 같아요. 사람 관계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나이스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히려 나를 못 챙기는. 아마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랑도 받고 싶은데 자존심은 세고.

사람들한테 먼저 다가가는 스타일 아니죠?
박은석:
맞아요. 잘 다가가는 편은 아닌데 누가 먼저 다가와주면 아이고! 이러는 스타일. (웃음) 그래도 인간관계에서의 이런 문제들은 좀 지나갔어요. 나이를 먹고 일을 하면서 나에게 책임이 주어지고 그것을 해내야 되는 상황들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줄어들더라고요.

2014년 [드라큘라] 초연 때 언더스터디로 대극장 주연을 처음 맡았는데 책임감이라는 면에서 많이 부담스러웠겠어요.
박은석:
그동안 제가 해왔던 것들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고민했던 것들, 노력했던 것들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였으니까. 인내의 시간들을 인정해줬다는 면에서는 좋았는데, 체력적으로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그걸 알게 됐죠. 자기 한탄할 시간이 없다. ‘잘해야 된다’ 할 시간 없다. (웃음)

‘잘해야 된다’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 거예요?
박은석:
정확하게 어떤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버려요. 막연하니까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지. 이상은 점점 높아지고 스스로를 강박에 몰아넣으니까 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못 하게 되는 것 같고. 2012년에 처음으로 배역을 맡았던 [왕세자 실종사건]의 구동이랑 [드라큘라] 초연 때 했던 드라큘라가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도 처음으로 중요한 도전을 했던 캐릭터들이라 그래요. 공연할 때 좋은 순간들이 참 많았거든요. 그런데 처음 하다 보니까 놓치는 게 많고,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많이 못 움직이다 보니까 아쉬움이 크게 남는 거예요. 여전히 막연하지만 연기할 때 그런 건 있어요. 내가 속이 시원해야 된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생각을 비우고 그냥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생각을 비우는 건 어떤 방식으로 해요?
박은석:
될 대로 되라. (웃음) 사실 이런 성격을 가진 분들은 벼랑 끝에 갔을 때야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좀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저 같은 경우는 무대에 서야 되니까 나를 가두고 있는 틀을 깨려면 자극제가 필요한 거예요. 에이 모르겠다 몰라! 난 연습했으니까 됐어! 그런 경우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리고 그럴 때가 있더라고요.

은석 씨한테는 언제가 벼랑이에요?
박은석:
매 순간. 진짜.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저희는 하루하루 새롭게 관객들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서 더 그래요. 다음 작품이 시작되고 나서도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됐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연습을 많이 하고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해도 한 인물을 한정된 기간 안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매 순간이 벼랑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판단받는 직업이라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을 관객들이 많이 느끼지 못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니까.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고 마음먹었다가도 그게 잘 안되면 또 확 쪼그라들잖아요.
박은석:
그것 때문에 또 힘들어요. 근데 또 ‘될 대로 되라’를 좀 많이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신 차리자’ 할 때가 와요. (웃음) 그럼 뭔가 해야 될 때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니까 완급조절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동안 했던 캐릭터 중 [드림걸즈]의 지미는 제일 튀는 캐릭터였잖아요.
박은석:
내 안의 또 다른 소울의 본능이. (웃음) 재밌었어요. 서재형 연출님이나 학교 다닐 때 연기 선생님께서 프로 무대에서는 배우의 결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배우에게는 이미지 같은 게 중요하기도 하고 그게 곧 자산이 되기도 하니까. 저와 다르더라도 잘 소화해낸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자신에게 맞는 캐릭터를 잘 하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닐까 싶어요. 저는 제가 갖고 있는 외형적인 조건들이 날카롭고 무겁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대신 해결해야 할 일들은 있겠죠. 고전이나 라이선스 작품을 주로 해서 번역투 같은 게 있는데 좀 더 내 말처럼 해야 될 것 같아서 적정한 선이 어디일지 찾는 중이에요.

한동안 라이선스 대극장 뮤지컬 재연작을 주로 했는데, [페스트]는 창작 초연작이었잖아요. 이 작품은 어떻게 기억될 것 같아요?
박은석: 결과가 안 중요할 수는 없지만, 결과는 저 말고도 다른 요인들도 많으니까 그것만으로 저 자신을 다그치진 않아요. 대신 과연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를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스스로 대답을 못 하면 혼나야 될 일이고, 추억이 남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싶어요. 이번 작품은 방대한 분량 안에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잘 담아낼 것인가를 같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많았어요. 힘들었지만 재밌었어요. 토론이라는 게 잘못하면 감정싸움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우리 팀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커튼콜의 댄싱머신으로 기억되는 거 아닐까요?
박은석: 아, 커튼콜 얘기 많이 나오네요. 하아. 사실 저는 추고 싶지는 않은데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작품이 그렇게 무거운데 퇴장 음악에서는 조금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냐. 생각해보니까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췄다 안 췄다 해요. 제가 관객이라면 ‘아유, 왜 이래’ 이럴 것 같은데 그건 저고, 저는 이 무대 위에 선 배우니까 필요하다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야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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