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여왕], 달리는 여자 앞에 비밀은 없다

2016.09.07

* 영화 [범죄의 여왕]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달 수도요금이 120만 원 나왔다. 서른 살 고시생이 기댈 곳은 하나뿐, “엄마, 나 좆 된 거 같아!” 다급한 SOS에 믿음직한 목소리가 답한다. “엄마가 해결할게.” 어떻게? 지방 소도시에서 불법 시술을 해가며 조그만 미용실을 근근이 꾸려가는 미경(박지영)에겐 돈도 없고 연줄도 없다. 하지만 빨간 립스틱에 빨간 하이힐, 화려한 원피스를 원더우먼의 코스튬처럼 위풍당당하게 차려입은 엄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일단 서울로 출동한다. 영화 [범죄의 여왕]은 그렇게 이상한 느와르의 세계에 대책 없이 뛰어든 엄마의 모험담이자 영웅담이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중년 여성은 모성애로 똘똘 뭉친 엄마, 혹은 억척스런 아줌마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왔다. 미경은 다 자라다 못해 늙어가는 아들 익수(김대현)를 아이 다루듯 끔찍이 아끼며 떠받들지만, 아들은 자신의 문제를 몽땅 엄마에게 떠넘긴 마마보이 주제에 “촌사람이라 무식한” 엄마를 시종일관 무시하며 얼른 치워버리고 싶어 한다. 미경이 수도요금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마주한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경찰 역시 한낱 ‘아줌마’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비웃어댈 뿐이다. 그러나 아들 외엔 세상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미경은 그 ‘어른-남자-권위’의 벽 앞에 기죽는 대신 산전수전 다 겪어 겁날 것 없는 배짱과 친화력으로 잠긴 문을 하나씩 열어 젖혀나간다. 그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상스럽지 않고, 약자에게 행해지는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정의감을 가졌으며, 아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존중하는 어른이다. 미경은 부모 없이 관리사무소에서 착취당하는 개태(조복래)를 챙기고, 남들이 무시하는 고시생 덕구(백수장)와 진숙(이솜)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실패자’들의 멋진 공조를 이뤄내며 사건의 진상에 점점 다가서게 된다.

[범죄의 여왕]은 지난 6월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 이어, 자식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중년 여성이 중심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이 끔찍한 비극을 겪은 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부조리한 세계를 부수며 끝까지 가는 여성이었다면, 미경은 자신을 얕잡아 보는 세상을 뒤로하고 거침없는 기세와 날카로운 추리로 진실에 다가가는 여성이다. 영화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 미경의 육감적인 미모를 캐릭터의 중요한 매력으로 보여주지만, 그를 괜한 성적 위협의 상황에 몰아넣는 등 불필요한 방향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사이드킥 개태에게 ‘엄마’가 되어주겠다던 히어로 미경의 제안은 뻔한 유사 모자 구도로 이어지지 않고, 둘 사이에 피어나는 성적 긴장감은 독특한 콤비 겸 커플의 탄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줄곧 아들을 세상의 중심에 놓았던 엄마 미경은 결정적 순간 아들이라는 마지막 벽마저 넘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한다.

엄마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벗어난다. 이것은 극심한 남초 현상과 함께 다양성의 결핍에 시달리는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배우와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하고, 얼마나 더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처럼, [범죄의 여왕]에서 박지영의 매혹적인 연기와 화면을 장악하는 에너지 역시 모처럼 기회를 만난 고수가 내공을 펼치듯 신선하게 압도적이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 속, 특히 범죄 스릴러의 세계는 수트 입은 조폭 아니면 허름한 점퍼 차림의 형사들로 가득한, 30대 이상 남자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대개 남성이 쟁취해야 할 대상이나 희생자, 조력자에 머물렀고 그중에서도 중년 여성의 존재는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채였다. 그러나 올해는 연홍과 미경이라는 개성 강한 영웅들, 비범한 두 여성이 좁은 틈을 뚫고 나와 척박한 땅에 자신의 깃발을 꽂았다. 아직 넓은 영토는 아니지만, 선명하게 휘날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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