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일본으로 ‘탈출’하는가

2016.09.09
2011년 5월 18일에 발급받은 나의 세 번째 여권에 붙어 있는 일본 입국 스티커 수를 세보았다. 서른 번을 넘긴 것이 2015년 겨울이고 그 이후로 많이 추가되었다. 여권 만기까지 5년이 남았지만 여권에 빈 페이지는 둘뿐이다. 꼼꼼한 일본 입국심사관들은 여백이 얼마 없는 여권을 보고는 한 쪽에 스티커를 3개씩 가로로 붙이기 시작했다.

왜, 일본을, 그렇게까지. 첫 번째 답은 오로지 편리해서다. 내 경험으로 오사카 왕복 13만 원부터 비행기표를 구해봤다(편도 9,900원짜리 표도 있지만 그 표는 유니콘과 같아서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만 샀다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최장기 비행 구간인 인천-삿포로가 2시간 45분, 삿포로-인천이 3시간 걸린다. 시차는 없다. 도쿄 하네다 공항과 오사카 간사이공항까지는 김포공항에서도 출발이 가능하다. 당일치기 여행도 안 될 게 없다.

하지만 저가 항공 운행 전부터 걸핏하면 일본으로 탈출했던 나에게, 일본이 주는 가장 큰 자유는 ‘묻지 않음’이었다. 비즈니스 호텔엔 5만 원부터 15만 원 사이에 ‘욕조가 딸린 1인실’이 있다. 한국에서 여행을 다니려면 그 가격에 갈 곳은 창문이 열리지 않고 방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모텔뿐이었다(한 모텔에서 2박을 한다고? 낮에 당신이 외출한 동안 대실을 안 하는지 확인하라). 무엇보다 “아가씨 혼자야? 뭐 하는 사람이야?”를 열쇠를 줄 때마다 묻는 카운터의 중년들(모텔 주인인 듯한)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비즈니스 호텔은 한국의 모텔보다 대체로 좁다. 그래도 괜찮다. 큰 창이 있고 복도 조명이 밝으며, 아무도 나에게 혼자인지 일행이 있는지, 여기에 왜 왔는지 묻지 않는다. 식당을 가도 묻지 않는다. 왜 혼자인지, 일행인 남자는 남편인지 남자친구인지 묻지 않는다. 묻는 것이라고는 일행이 몇 명인지와 메뉴 이름뿐이다. 손님에 대해 몰라도 서비스하는 데 지장 없는 것은 전혀 묻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본전 생각을 할 일이 없다. 숙소든 먹거리든, 대체로 내가 낸 가격에 비례한 품질과 서비스를 보여준다. 380엔을 주고 먹은 요시노야의 규동도, 국물을 셀프서비스로 양껏 떠갈 수 있는 편의점 어묵도, 1인분에 7,000엔을 훌쩍 넘기는 가이세키 요리도, 돈 낸 만큼 나온다. 아니, 대체로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나오고 실망할 일은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겠다. 갈 때마다 맛이 달라지지 않고, 갑자기 서비스라고 인심을 쓰지도 않는다. 프렌차이즈 레스토랑 지점마다 맛이 들쭉날쭉하지 않다. 일본도 성수기 바가지가 있기는 매한가지다. 벚꽃철이나 단풍철의 관광지 숙박 요금은 3배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그 역시 성수기 표준가다. ‘부르는 게 값’이라거나 협상 능력을 동원하며 힘 뺄 이유가 없다. 식당 앞에 있는 음식 모형은 실제 나오는 음식과 (모양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 모든 과정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들을 일이 없다. 일본인이 가식적으로 친절하다며 오히려 불편함을 호소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불친절과 오지랖보다는 언제나 나았다.

일본에 자주 가는 이유는 얼마든 더 댈 수 있다. 온천 휴양이든 등산이든 위스키 증류소 탐방이든 쇼핑이든 원하는 형태의 여행이 거의 가능하며,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열도가 길게 뻗어 있어서 같은 계절에도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은가? 오헨로 순례길이 있다. 하지만 집과 회사에서 상실했을 자아를 다른 곳에서 찾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일본 브랜드 제품은 젤리부터 이불까지 전부 일본에서 더 싸게 살 수 있다(심지어 소비세 8%를 환급받을 수 있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와 편의점 음식만으로도 며칠이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일본 로손 편의점에서 파는 ‘프리미엄 롤케이크’는 네이버의 한 블로거 표현을 빌면 ‘이건 정말 안 먹으면 대재앙’이랄 정도로 맛있다. 무엇보다 물건을 사보면 알 수 있는 ‘다양성’ 면에서 일본은 늘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표준 체형과 거리가 먼 나는, 한국에서 사이즈가 맞으면서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옷을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에 가면 대체로, 캐주얼이든 정장이든 한국보다는 다양성을 갖출 수 있다. 뭐, 일단 유니클로가 있고. 유니클로 속옷 좋은 건 다들 아시죠?

이유, 참 많다. 하지만 통장에 돈이 조금만 고여도 일본으로 탈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여기’가 아닌 곳이며,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찰나라도 경험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여행이라고 이름 붙인 환상이 가닿는 곳은 언제나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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