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안 그레이], ★★★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진혼곡

2016.09.21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창작 초연│2016.09.03~10.29│성남아트센터
원작: 오스카 와일드│작곡: 김문정│편곡: 제이슨 하울랜드│작: 조용신│각색·가사·연출: 이지나│주요 배우: 김준수(도리안 그레이 역), 박은태(헨리 워튼 역), 최재웅(배질 홀워드 역), 홍서영(시빌 베인 역), 김태한(엘런 캠벨 역), 구원영(브랜든 부인 역), 진태화(초상화 역) 외
줄거리: 1884년 런던,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 도리안 그레이는 등장과 동시에 사교계의 주목을 받는다. 런던의 촉망받는 화가 배질 홀워드는 도리안을 본 순간 강렬한 영감에 사로잡히고, 그를 모델로 초상화를 완성한다. 사교계의 중심이자 배질과의 친구인 헨리 워튼은 아름다운 외모와 선한 심성을 모두 갖춘 도리안에게 ‘완벽한 인간’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접근한다.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헨리에게 점차 영향을 받게 된 도리안은 불멸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급기야 늙고 추해질 미래가 두려워진 나머지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초상화와 자신의 영혼을 맞바꾼다. 이후 첫사랑이었던 여배우 시빌 베인과의 로맨스마저 비극으로 끝나버리자, 도리안은 걷잡을 수 없이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자신만이 헨리가 말한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며 잔인한 기행을 멈추지 않던 어느 날,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자신과는 달리, 흉측하게 변해버린 초상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진혼곡
순수하지만 어둡고, 화려하지만 우울하다. [도리안 그레이]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영원히 아름답기를 갈망한 청년만큼 퇴폐적이고, 음험하다. 정상급 제작진과 배우들, 대극장 뮤지컬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낯설기 그지없다. 넘버들은 몽환적이고, 가사는 철학적이며 스토리라인은 무겁다. 애초에 인물들의 관념적인 문답만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써내려간 소설이 뮤지컬로 탄생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시작부터가 도전이었던 작품은 ‘뮤지컬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빗겨난다. 대신 처참하게 무너진 영혼을 어루만지는 한 편의 진혼곡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전형적인 뮤지컬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뮤지컬을 원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Portrait: 한 편의 거대한 입체 초상화
영혼이 갇힌 초상화의 심연을 상징하듯, 깊이감이 돋보이게 설계된 무대에서 각 장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걸어 나온다. 처음에는 배질, 다음은 도리안과 헨리. 그들이 등장할 때면, 무대 위에는 다양한 액자가 함께한다.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크기의 액자부터, 영혼을 비추는 거울 형태의 액자까지. 그러나 굳이 액자를 소품으로 세우지 않더라도, 모든 인물들은 무대라는 거대한 테두리를 두른 초상화처럼 느껴진다. 체코 플로스코비체의 고성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무대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뮤지컬 최초로 해외 로케이션을 감행한 보람이 있게도 영상은 단순한 뮤직비디오로의 활용을 넘어 무대의 디자인적 모티프가 되기도 하고, 무대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넘어 드라마를 확대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Challenge: 새로운 시도
라이선스와 창작, 보편과 파격 사이를 오가며 두루 사랑받아온 이지나 연출은 이 작품으로 몇 가지 감각적인 시도를 꾀한다. 그간의 뮤지컬에서는 군무를 제외하고는 딱히 부각될 여지가 없던 안무도 그중 하나다. 강도 높은 가창력이 요구되는 뮤지컬에서 과격한 동작을 병행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두 가지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김준수가 있기에 무용을 늘렸다”는 연출의 말대로, 안무가이자 댄스 컴퍼니 The Body의 대표인 류석훈이 현대무용에 기반을 두고 폭발력 있는 안무를 구성했다. 1막의 종장인 ‘Against Nature’는 별개의 퍼포먼스라 칭하기에도 무리가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한 편 의상으로 인물의 서사를 표현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도리안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며, 배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평대로 특히 세 인물에게 주목하는데, 주변 파괴적인 지성과 언변을 가진 헨리는 칼 같은 슈트를, 도리안의 아름다운 영혼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배질은 무채색의 의상을 차려입는 식이다. 도리안은 타락할수록 의상도 눈에 띄게 요염해진다. 태국의 유명디자이너 튜브 갤러리(Tube Gallery)와 김도연 디자이너의 합작품인 180여 벌의 의상이 이를 가능케 했다. 작품이 탄생한 19세기 말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세밀하게 고증하면서도, 단지 컬러의 대비만으로 주변 인물과 서사는 그림자처럼 지워내고 오롯이 작품의 축인 도리안, 헨리 그리고 배질에게 집중하게 한다.

Music: 배우의 잠재력으로 자라난 넘버

송스루가 아님에도 넘버가 캐릭터를 구축한다. 넘버의 흐름을 따라 지극히 추상적인 캐릭터가 구체화되는데, 순수했던 도리안이 사악한 요물로 타락하고 헐벗은 영혼으로 짐승처럼 울부짖는 과정이 모두 넘버 안에 녹아 있다. 고음으로 점철되지 않았음에도 난이도는 극악하다. 서정적인 쇼팽의 연주곡으로 느긋하고 차분한 호흡으로 진행되지만 방심은 이르다. 1막 ‘아름답게 멈춰버린 나’, 2막 ‘감각의 완성’ 등 어디서 숨을 쉬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박자감,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가 줄을 잇는다. 배우들의 역량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다.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으로 작곡가로서의 기량도 드러냈던 김문정 음악감독이 작곡을 맡았는데, 말랑말랑했던 전작의 감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음악감독으로서 [엘리자벳], [모차르트!], [데스노트]를 함께 하며 이미 배우 개개인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듯 가장 밑바닥에 있는 감성까지 끌어낼 수밖에 없도록 전체 넘버를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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