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과 가인의 숙취 메이크업이란 가면

2016.09.30
메이크업은 일종의 가면이다. 그날의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꿔 쓸 수 있지만 쓰지 않으면 왠지 허전한 최고의 액세서리. 그런 면에서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과 가인의 ‘Carnival (The Last Day)’ 뮤직비디오는 마치 술에 취한 듯 상기된 낯빛을 지향하는, 1년 전 국내에 상륙한 일본산 가면 ‘숙취 메이크업’에 대한 한국 엔터테인먼트업계의 화답처럼 보인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말괄량이 삐삐 같던 레드벨벳은 ‘러시안 룰렛’에서 홍조를 띤 범죄소녀들로 변신했다. 그들은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서 누군가 입고 있는 올이 풀린 니트에 불을 붙이거나, 상대방이 잠든 새 몰래 침대를 길거리로 옮겨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머리 위로 냉장고·피아노를 떨어뜨린다. 소녀들은 법의 잣대를 조롱하듯 가해자와 피해자를 쉴 새 없이 바꾸며 또 다른 소녀를 처리하는 데 골몰한다. 레드벨벳이 ‘러시안 룰렛’에서 숙취 메이크업의 일환으로 한, 양 볼과 콧잔등을 뒤덮은 핑크빛 블러셔는 이 섬뜩한 비행을 중화하는 효과적인 가면이다. 미국 색채연구소 팬톤이 선정한 올해의 색 ‘로즈쿼츠’를 얼굴 정중앙에서부터 그라데이션한 것 같은 화장법은 레드벨벳이 뮤직비디오에서 하는 행동이 영화 [배틀로얄] 식의 노골적인 잔혹성과 결부될 여지를 차단한다. 또한 뭔가에 열중한 채 살짝 흥분한 것 같은 낯빛은 테니스 원피스나 여중생용 체육복 등 명백히 ‘소녀’를 연상케 하는 의상과 결합, 이들의 행위를 미성숙한 아이들의 가학적인 놀이 정도로 치부하고픈 시청자의 욕구에 면죄부를 준다. 숙취 메이크업은 팀 버튼의 세계에서 툭 튀어나온 듯 기묘했던 레드벨벳의 기존 이미지가 보다 안전한 영역으로 나아갔다고 믿게 만드는 일종의 위장막이다. 
 
반면 가인은 숙취 메이크업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집중했다. 가인이 공개한 ‘Carrie (The First Day)’의 티저 영상인 ‘Carrie, Prequel of Carnival’, 그 연장선상에 있는 ‘Carnival (The Last Day)’ 뮤직비디오는 가인이 분한 ‘캐리’란 여성이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어딘가로 가는 여정, 그곳에서의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찰나를 각각 포착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하나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숙취 메이크업이다. ‘Carrie, Prequel of Carnival’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상기된 얼굴색은 기차역에서 꾸벅꾸벅 졸다 갑작스럽게 깨어나 화장을 고치고, 표를 잃어버린 것도 모른 채 기차에 올라 허둥대는 몸짓과 결합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 객실 안 액자를 그대로 통과하는 손,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차 등의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부합해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지대로 시청자를 이끄는 초대장이다. 


얼굴 중앙에서 서서히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이 기묘한 화장법은 ‘Carnival (The Last Day)’에서 더욱 직관적으로 활용됐다. 대리석 제단 위에서 눈 뜬 가인은 “내가 처음부터 없던 날로 떠나볼까요”라며 영혼이 되기 전 과거의 한때로 관객들을 소환하고,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불꽃처럼 사라질 완벽한 순간”을 회상한다.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산을 든 채 정신없이 춤을 추기도 한다. 자신이 주관한 축제에서 다시 만끽한 삶의 활력을 짜릿한 흥분에 휩싸인 얼굴로 시각화했다. 코르셋 스타일 레이스 블라우스, 화이트 스윔 수트로 특유의 섹시한 매력을 유지했지만, 숙취 메이크업으로 너무 자극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제어했다. 
 
이렇듯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선 달뜬 얼굴들은 할리퀸 메이크업의 강렬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각인됐고, 레드벨벳과 가인은 기존 이미지를 변주하는 데 성공했다. 걸 그룹 멤버들이 유독 숙취 메이크업에 자주 도전했던 것도 레드벨벳과 가인의 활용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AOA의 설현·지민·유나, EXID의 하니, 여자친구의 소원·예린, 애프터스쿨의 리지 등 걸 그룹 멤버들을 비롯해 설리·구하라 등도 이 독특한 화장법을 시도한 바 있다. 숙취 메이크업은 지금 ‘센 언니’ 아니면 ‘청순발랄한 소녀’이길 강요받는 특정 직군의 젊은 여성들이 모호하고 기묘한 중간지대로 나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스타그램용 셀피에서조차 종종 반듯함을 요구받는 특정 연령대의 여성들에게 가상의 흐트러짐을 선사하는 해방구 역할도 하고 있다. 레드벨벳처럼 공격적인 상황의 중화제로 쓰든, 가인처럼 섹슈얼함의 완급 조절용으로 쓰든 상관없다. 블러셔의 양과 펴 바르는 면적만 조절하면 취한 듯 몽롱한 정서를 자아낼 수 있는 전천후 가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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