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통치론], 국가 폭력이라는 비극

2016.10.07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다. 사법, 치안, 국방 등 힘의 행사는 국가의 고유 권한이다. 사적인 폭력이 용인되는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예측 불가능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세상은 ‘공평한 폭력의 자유’가 있는 세상보다 정의로울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라고 한 발 물러서는 이유는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대책 없는 깡패국가일 수도 있다. 이런 세상은 사적 폭력의 무한경쟁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족쇄를 차야 한다. 그게 헌정적 질서고, 그게 법치주의 원칙이다. 국가는 오직 사전에 공포된 헌정적 원리와 적법절차에 의해서만 폭력을 행사하도록 제약받는다. 만일 이 제약을 국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민 또한 이 국가가 깡패국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인민이 국가의 폭력 독점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이용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 힘을 구속하지 않는 국가는 그 결정적인 믿음을 제공할 수 없다.

이 족쇄 덕분에 국가는 그저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국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가 된다. 국가와 깡패집단이 거의 구분되지 않았던 인류사 초창기로부터 머나먼 길을 돌아, 21세기 들어서도 일부 국가만 도달한 위대한 성취다. 나는 내가 속한 공화국이 그 일부에 속한다는 사실이 좋다. 내가 공화국에 충성하는 이유는, 그것이 국민 된 도리여서가 아니라, 이 공화국이 사적 폭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아주 괜찮은 거래를 제공해서다.

이 원리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명하여서 이걸로 책 한 권을 쓰는 현대 저자를 찾기는 아주 어렵다. 차라리 국가를 다루는 책이라면 다들 바탕에 깔아 뒀다고 하는 편이 옳다. 정색하고 전개하는 저자를 찾으려면 이 아이디어가 논쟁적이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게 17세기다. 1689년에 나온 존 로크의 [통치론]은 이 원리가 인류의 사고체계에 등장하는 원형을 보여주는 고전이다. “사람들은 자연상태에서의 권한을 사회의 수중에 양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모든 사람이 그 자신, 그의 자유 및 재산을 더욱 잘 보존하려는 의도다.”

지난해 11월 경찰의 물포를 맞고 쓰러진 한 농민이 10개월 이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올해 9월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에는 두 층위의 책임이 등장한다. 물포를 쏘는 과정이 매뉴얼을 따랐는지, 물포 살수자에게 고의성이 있었는지 등은 이 죽음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하다. 이는 법정에서 따질 일이다. 그와 별개로, 우리가 양도하여 국가가 독점한 폭력이 무언가 오작동을 일으켜, 법에 의하지 않고 국민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발생하는 책임이 있다. 여기에는 공화국의 기본계약이 걸려 있다.

독점한 폭력을 운영하다 본의와 달리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이것만으로 공화국의 파산을 선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죽음은 기본계약에 중대한 질문을 던지므로, 공화국의 운영자들은 적어도 대답할 의무를 진다. 그런데 사건 이후 경찰청장은 국회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관계와 법률관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사과를 한다는 것은 (중략) 이성적이지 못하다.” 그는 기본계약을 수호할 공화국 운영자의 책임과 피고인의 형사적 책임이라는 두 층위를 터무니없이 뒤섞어버렸다. 그나마 말이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는 10개월 내내 대답할 의무로부터 도망다녔다.

이 사건은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철회할 계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무를 회피하는 이들이 우리 공화국의 ‘괜찮은 거래’를 더 이상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할 계기가 된다. 기본계약을 수호할 의지가 없는 운영자가 공화국에 끼치는 해악은, 폴리스라인을 넘는 시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300년도 더 된 로크의 아이디어가 2016년 우리 공화국의 비극을 다루는 도구로 모자람이 없다. 이 허탈한 시대착오가 비극을 차라리 희극으로 만든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목록

SPECIAL

image 김생민의 영수증

MAGAZINE

  • imageVol.171
  • imageVol.170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