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야구장마저 갈 수 없는 2016년

2016.10.10
지난 10월 1일, 잠실 야구장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LG 트윈스(이하 LG) 유니폼을 입은 30대 남성이 경기 종료 후 의상을 갈아입으러 이동하던 SK 와이번스(이하 SK) 치어리더의 신체 일부를 강제로 접촉한 것이다. 이 소식을 며칠 지나 알게 되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엉망진창의 시즌을 보내며 일찌감치 가을 야구에서 멀어졌고, 경기를 보는 것뿐 아니라 뉴스를 접하는 일까지 괴로워서 야구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장에서의 성추행은 우리 팀의 성적보다 훨씬 더 끔찍한 소식이었다. 경기 직관을 종종 가는 야구팬이자 여성으로서 야구장마저 성폭력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에 속상하고 화가 났다.

사건 당일 홈팀인 LG에서는 이 사건이 개인 간의 문제일 뿐 구단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보도들을 모아 파악한 LG 이형근 홍보팀장의 발언 가운데 가해자가 LG 유니폼을 입은 관중일 뿐, LG 팬인지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는 비겁했다. LG와 SK의 경기에 굳이 LG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보러 간 관중이 LG 팬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특정 팀 팬을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건 10개 구단 어느 경기장에서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원만하게 수습하고 앞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아야 할 관계자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한 태도는 적절치 못했다. ‘많고 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다’며 구단에서 나설 필요가 없다는 코멘트는 더 나빴다. 이번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흔한 성폭력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여성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길거리, 대중교통, 학교, 상업용 건물 화장실을 비롯한 일상의 공간 어디에서나 여성들은 추행과 폭력을 실제로 경험하거나 잠재적인 공포에 시달린다. “지하철에서 여성들이 성추행당한 거랑 마찬가지다. 성추행범과 피해자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다.” 이 팀장의 이야기 가운데 나는 이 대목이 가장 서글펐다. 2016년의 대한민국은 종종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정글의 섭리를 옹호하는 언어가 넘쳐난다. 그리고 야구장 운영 주체를 대변하는 사람조차 약자에 대한 힘의 행사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자력구제를 권하고 있다. 다른 공공장소처럼 야구장도 여성들에게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확인했다면 이는 조용히 넘길 이유가 아니라 더 알리고 함께 해결해야 할 이유가 된다. 그곳이 야구장이기 때문이다.

야구장 성추행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도, 남성과 여성 간의 대립도, 팀과 팀 사이의 싸움도 아니다. 이건 문명 대 야만의 다툼이다. 그곳이 잠실이건 사직이나 고척이건 나는 개인이 신체의 안전과 자유를 위협받지 않으며 경기를 즐기고 마음껏 내 팀을 응원하거나 불평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구단들이 이를 위해 노력해 안전하게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그곳을 방문하는 이용자들 역시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는 토론을 통해 야구팬의, 그리고 자기 팀 팬덤의 긍지를 지키기를 바란다.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장 가기를 좋아하는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애정을 가진 커뮤니티가 건강하게 유지되기를 원한다. 그래야 내가 그곳에 자발적으로 속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치어리더나 배트걸들이 노동자로서 적절한 근무 환경을 보장받고, 여성 리포터나 아나운서가 희롱당하는 일 없이 방송 전문가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야구 규칙을 알려주는 프로그램들이 젊은 여성에게 ‘오빠’가 한 수 알려주는 관점이 아니라 초심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향하기를 바란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복잡하고 섬세한 규칙을 가진 이 스포츠를 둘러싼 사회 또한 그만큼의 지성과 교양에 근거해 운영되기를 꿈꾼다. 야구장의 다수를 구성하는 여성들이 원하는 건 그곳의 꽃이나 부속품, 양념으로 취급받는 게 아니라 같은 인간이자 동료 시민으로 존중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야구장 바깥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서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거나 학교를 그만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야구장이 점점 안전하지 못하거나 불쾌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여성 관중으로서는 아쉽지만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야구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해방감과 즐거움의 공간이던 야구장이 점점 두려움과 불쾌감의 장소가 된다면 그건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야구장의 여성 관중 비율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구단들이 야구장 성추행을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안일하게 대응해서는 안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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