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한국 예능에 대한 크러쉬!

2016.10.10
배구 스타 김연경이 MBC [무한도전]에 나와 밝힌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걸 크러쉬’다. 최근 방영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도 김연경은 터키로 출국하기 전 시간을 쪼개 공항에서 자신의 팬클럽인 ‘연경홀릭’ 여성 팬들과 팬 미팅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부러 팬클럽 컬러에 맞춘 옷을 입고 온 김연경이 “고마워요” 한마디만 해도 ‘꺄악’ 비명소리가 나오고, ‘윙크해주세요’, ‘언니 사랑해요’ 같은 외침이 들리며, 김연경이 터키로 떠난다는 사실에 눈물 흘리는 이 장면은 아마 그동안 실체 없이 소비되던 걸 크러쉬라는 개념이 예능, 아니 방송을 통틀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순간일 것이다. 여성에 열광하는 여성, 그리고 그런 열광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여성. 많은 연예인이 여성과 여성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콘셉추얼한 차원으로만 국한시키기 위해 ‘걸 크러쉬’ 개념 뒤에 숨었다면, 김연경은 자신의 인기에 당혹해하지도 뭐라고 부연하거나 단서를 달지도 않는다. 하하, 여자들에게 인기 많다니 좋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나고 바쁘게 김연경을 섭외한 예능에서 그의 독특한 포지션과 캐릭터를 살리려 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 예능인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이하 [언니들])는 김연경을 섭외하며 스스로 ‘걸 크러쉬의 만남’이라 자부했다. [언니들] 멤버들이 김연경의 외모에 대해 배구선수 미모 1위라거나, 들꽃 같다고 하거나, 청순하다고 칭찬할 때 평소 같으면 자연스레 따라올 이성에 대한 인기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난 건 흥미로운 장면이다. 멤버인 김숙이 과거 KBS [해피투게더 3]에서 “예쁘면 (‘걸 크러쉬’) 최하위권”이라 했던 것과 비교해보라. 올림픽 영웅에 대한 예우를 고려하더라도, 시작과 함께 장신인 홍진경이 쏘옥 안긴 순간부터 [언니들] 멤버들은 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동경과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활력과 반짝임은 ‘걸 크러쉬’를 활용하려는 연출 안에서 오히려 빤하게 퇴색된다. 래퍼라는 꿈을 이뤄주는 과정을 Mnet [언프리티 랩스타]의 패러디 수준으로 진행한 건 기획으로서도 빈곤하며 결과적으로 또다시 ‘걸 크러쉬’를 센 언니들의 코믹한 스웨그 수준으로 가둬버렸다. 그 와중에도 주눅 들지 않고 흥을 보인 김연경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그가 [언니들] 멤버들과 시청자를 사로잡은 건 역시 비치발리볼 파트너로 권유받은 국가대표 동료들에 대해 “걔는 수비가 안 돼”라고 말할 때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멋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김연경이라는 전에 못 본 새로운 캐릭터와 현상 앞에서 기존의 예능이 우왕좌왕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나 혼자 산다]에서 몇 번이나 ‘쏘쿨’, ‘쿨내 진동’이라는 자막을 달기도 했지만 그는 딱히 무언가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성큼성큼 직진한다. 차가 긁혔다면 긁힌 채로 타면 되고, 인터넷이 안 터지면 노트북을 덮으면 된다. 타인의 시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검증된 배구 실력에 있어 겸양하지 않는 건 당연하며, 팔씨름으로 제시를 이긴 뒤에도 “너한테 진 남자들 누구야 도대체”라며 한껏 득의양양하다. 겸손도 변명도 없이 자신의 실력과 인기에 어떤 위화감도 보이지 않는 김연경은 기존의 어떤 스포츠 스타보다는 차라리 SBS [시크릿가든]의 김주원(현빈) 같은 잘난 개인주의자 왕자님에 가깝다. 촬영이 끝나고 조금 더 놀고 싶어 하는 홍진경에게 “질척거리시네 진짜”라고 말하는 모습에 김주원을 대입해 상상해보라. 하지만 앞서 말했듯 [언니들]의 래퍼 도전기는 식상한 이미지만을 나열했고, 아무 맥락도 없이 ‘릴레이 웹툰 특집’의 결과 발표를 위해 김연경을 부른 [무한도전] 역시 “식빵” 사건을 몇 번씩 우리고 놀리며 센 언니 캐릭터를 잠깐 소비하는 것에 그쳤다. 잘생긴 걸 알고 잘생겨서 안 좋은 건 하나도 없다는 [무한도전] 500회에서의 정우성의 발언은 사실 몇 주 전에 여자의 입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

김연경을 예능에서 만난 지난 몇 주의 시간에는 전혀 새로운 여성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그런 여성을 제대로 활용하기에 여전히 여성을 몇몇 범주화된 스테레오타입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한국 예능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한다. 모두가 ‘걸 크러쉬’라는 자막을 쓰지만, 짧은 바지를 입고 긴 다리를 드러내 마치 ‘담다디’ 시절의 이상은에 다리를 15㎝ 더한 느낌으로 아름다운 터키 시내를 걷는 그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제작진의 개입이 거의 없는 [나 혼자 산다]에서만 볼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나. 다행인 건 숨길 수 없는 큰 키처럼, 그의 독특함 역시 예능에 쉽게 포섭되지 않고 송곳마냥 삐죽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올림픽 직전에 촬영한 SBS [토요일이 좋다] ‘백종원의 3대천왕’에서 남자친구 없으면 닭 날개를 먹어도 된다며 넘기는 백종원에게 고맙다고 하는 대신 “옛날분이시네요”라고 면전에서 말할 때 드러나는 어떤 균열. 이걸 자막을 통해 입담 대결 정도로 축소하려는 프로그램의 태도에는 약간의 황망함이 보인다. 이처럼 여성을 몇 개 범주로 가두려는 예능의 세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결국 창작자의 선의보다는 기존의 세계에 생채기를 내고 문제점을 드러내는 새로운 여성들일 것이다. 김연경이 그랬고 최근의 이시영이 그러하며, 솔비도 종종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걸 크러쉬’의 조어를 이루는 ‘크러쉬(crush)’란 단어에는 부순다는 뜻도 있다. 제대로 부수고 제대로 치이며,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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