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혁명하는 여자들], 공상 그 너머

2016.10.14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다. 출판계에 소수의 권력자들로 구성된 SF카르텔이라는 조직이 있어서 이들의 의중에 따라 지망생들의 등단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김자연 성우 교체 논란 당시 많은 SF작가들이 김자연 성우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자 어딘가에서 이들을 ‘꼴페미’에 ‘메갈 작가’라며 비난하는 와중 나온 이야기였다. SF작가들 사이에는 일종의 유대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결속은 폐쇄적이라기보다는 개방적이다. 나와 동료들은 약간이라도 SF적인 소재를 쓴 작가가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 에워싼 뒤 친한 척을 하며 역시 SF가 최고라고 세뇌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접근을 받은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이 SF였느냐며 놀란다. 카르텔치고는 좀 소박하다.

그래도 SF가 페미니즘과 무관한 장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근자의 페미니즘 이슈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한 곳 역시 SF출판이었다. 이러한 자평은 팔이 안으로 굽어서만은 아니다. SF에서 역시 미소지니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니까. 그러나 화성인이나 인공지능 그리고 좀비들이 지구를 지배하는 이야기를 즐기면서도 여성의 인권이 나아진 사회는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좀 염치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런 조류에 맞춰 페미니즘 SF 선집 [혁명하는 여자들]을 권한다. 재미 면에서는 제임스 탑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을, 깊이 면에서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를 더 높게 치기는 하지만 [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수록된 열다섯 작품들은 시간적으로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공간적으로는 미국에서 일본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대적, 인종적 화두를 아우르며 페미니즘과 SF, 양측에서 시도했던 경이로운 실험의 결을 한 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하는 여자들]에서 페미니즘과 SF를 다루는 방식의 폭 또한 넓다. ‘늑대여자’나 ‘가슴 이야기’처럼 가부장 사회의 남녀 문제를 다룬 작품부터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나 ‘애들’과 같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가상의 공동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 여성의 신체를 소재로 한 ‘중간관리자를 위한 안정화정책’과 ‘식물의 잠’과 같은 작품 등 여성과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 다채로운 위치의 시선은 SF라는 장르가 가진 혁명적인 잠재력을 잘 보여준다.

역자 신해경은 [혁명하는 여자들]의 후기에서 ‘SF소설은 재미난 사고실험의 장이자 그 사고실험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매개체’라고 평했다. SF를 공상과학이라 번역할 때 SF팬덤이 화를 내는 이유는 SF가 가진 사고실험으로서의 특색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사고실험에는 공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현실과 괴리되는 특정한 상황을 가정하는 동시에 다양한 변인을 설정하고 가상의 실험을 전개하며 변수들의 어울림을 서사를 통해 예측하고 묘사하는 과정은 상상에 논리를 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F가 가진 이런 힘은 이야기의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미래를 재편하고 개혁하는 운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는 페미니즘에도 마찬가지다.

공상의 세계는 아름답다. 공상의 세계, 동화의 세계에 갇혀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것이 어쩌면 속은 편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이제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손을 잡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공상 속에서 살다가 이것이 불가능함의 논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 너머를 열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기에 ‘Girls Do Not Need A Prince’ 다음으로 ‘Sisters of the Revolution’은 일종의 필연일 것이다.

dcdc
영화배우 김꽃비의 팬. SF작가. 장편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단편집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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