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한국인이면 토트넘 좀 응원합시다

2016.10.17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엘 04 레버쿠젠에 있던 시절 손흥민은 리버풀 FC(이하 리버풀) 이적 대상으로 오르내린 적이 있다. 그리고 후회한다. 리버풀 팬으로서 그때 손흥민이 리버풀에 오길 간절히 바라지 않은 것을. 비록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최근 토트넘 홋스퍼 FC(이하 토트넘)에서 손흥민이 보여주는 플레이는 그만큼 압도적이다. 3경기 동안 4골 1도움을 기록하며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 9월 MVP에 오른 것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수치로 설명하기 어려운 파괴력이 최근 그의 플레이에는 있다. 가령 1도움으로 역시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던 맨체스터 시티 FC(이하 맨시티)와의 대결에선 비록 골은 못 넣었지만 그가 쇄도할 때마다 맨시티 수비가 무너지는 장면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BBC는 이 경기의 MOM(Man Of Match)으로 손흥민을 꼽았다. 한국인 선수가 빅리그에서 조금만 활약해도 호들갑을 떠는 게 한국에서의 여론이라지만, 최근 손흥민의 폼에 대해선 해외 매체도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도 도와준다는데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시큰둥했나.

손흥민 영입설이 돌면서 리버풀 팬 사이에선 농담처럼 ‘제한리(제발 한국인이면 리버풀 좀 응원합시다)’ 같은 농담이 돌기도 했지만,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선수를 바라볼 땐 응원의 마음과 내셔널리즘에 대한 반감이 교차한다. 한국 선수를 좋아하면 ‘국뽕’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최고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하 맨유)에 입단하며 한국 해외축구 팬덤의 새로운 장을 연 박지성은 위대한 선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잘한다는 것보다는 열심히 하는 것에 방점이 찍혔다. 물론 그는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쳤고 그것이 그의 큰 장점인 것도 맞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것은 축구라는 영역 안에서 전술적으로 평가되기보다는 성품의 문제처럼 다뤄졌다. 2008년 [스포츠조선]은 박지성의 UEFA 챔피언스리그 활약을 다루며 ‘박지성 정신 전 세계적 화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2009년 방영한 [MBC 스페셜]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 역시 “헌신이라는 말에 대해 이해하는 선수”라는 젠나로 가투소의 칭찬을 비롯해 여러 해외 축구인들의 평가를 잔뜩 모아놓되, 그것이 정확히 축구에서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구현되는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박지성이 동료인 호날두나 나니, 에브라 등과 얼마나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쳤느냐보다는 그의 울퉁불퉁한 발의 이미지에 집중하는 서사는 다분히 위인전을 닮았다. 외국의 개인주의자들과는 다른 한국에서 온 헌신의 아이콘 박지성. 스포츠 내셔널리즘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은 종종 촌스러운 형태로 발현되었다.

지금 손흥민의 플레이를 보는 게 특별한 건 그래서다. 앞서 말했듯 잘하기도 잘하지만, 그의 파괴적이고도 유려한 플레이는 직관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미들즈브러 FC를 상대로 2골을 넣었던 순간이든, 맨시티를 상대로 적진을 휘젓던 순간이든. 세계의 명장들과 스타플레이어들이 몰려들어 어느 시즌보다 4강 경쟁이 치열해진 프리미어리그에서 무패를 기록 중인 토트넘에서도 그는 가장 눈에 띄는 존재다. 이것은 이미 뛰어난 플레이어인 박지성에 대해 끊임없이 퍼거슨의, 루니의, 호날두의, 에브라의 평가를 통해 세계적 수준을 증명받고 싶어 하던 시절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과거 김어준은 [한겨레] 칼럼을 통해 박주영을 1970년대의 차범근, 그다음 세대의 악동 이천수 등과 비교하며 “제대로 신인류”이자 “스스로 테제”라고 극찬한 바 있지만, 사실 여기에 더 부합하는 건 손흥민이다. 그는 분데스리가 선배인 차범근처럼 유럽인 못지않은 피지컬로 승부를 하는 것도, 박지성 같은 이타적인 플레이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악동인 이천수나 기성용처럼 당돌함과 오기로 맞서지도 않는다. 청소년 때부터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SV에서 뛰었던 이 청년에게 한국과 세계의 이분법은 별 의미가 없다. 그는 EPL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그냥 넘어왔을 뿐이다. 세계의 벽 앞에 주눅 들지 않는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세계 무대의 일원으로서 필드를 누비는 존재. 누구도 박지성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또한 손흥민은 그 자체로 포스트 박지성이 아니다.

물론 여전히, 한국인 선수를 다루는 미디어의 방식은 박지성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지난 EPL 6라운드에서 리버풀은 헐 시티 AFC와의 대결에서 5 대 1로 대승을 했지만 팬들은 해당 경기를 생중계로 확인할 수 없었다. 스포츠 채널과 네이버를 통해 생중계된 세 경기는 손흥민의 토트넘, 이청용의 크리스탈 팰리스 FC, 기성용의 스완지 시티 AFC의 경기였다. 2013-2014 시즌 리버풀과 첼시의 36라운드 경기가 전 시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시장에서 재밌는 경기, 리그 내 빅 매치보다 우선시되는 건 한국인 선수들이다. 한국인 선수가 없는 클럽의 팬이라면 다시금 시큰둥해질 법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젠 손흥민의 경기를 포기하긴 어렵다. 단언컨대, 현재 토트넘의 경기는 손흥민의 플레이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청할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내셔널리즘의 강박 없이 한국인 청년의 플레이를 축구 그 자체로, 리그의 가장 ‘핫한’ 순간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손흥민이 아닌 그냥 손흥민의 경기로. 한국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오랜 시간 콤플렉스 극복의 서사였다면, 손흥민에 이르러 어쩌면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속은 좀 쓰리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발 한국인이면 토트넘 좀 응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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