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는 ‘알탕 영화’인가, 오해받은 수작인가

2016.10.17
영화 [아수라]에서 한도경(정우성)의 얼굴은 쉽게 아문다. 술에 취해 검사 김차인(곽도원)에게 대거리하다가 검찰 직원인 차승미(윤지혜)에게 병으로 이마를 맞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으며, 의자에 묶인 채 검찰 소속 조사원인 도창학(정만식)에게 기절 직전까지 얼굴만 얻어맞는다. 정우성 얼굴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는 생각이 들지만, 괜찮다. 밴드를 붙이고 까진 자국, 핏자국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렇게 정면으로 맞았어도 코가 부러지거나 눈이 록키처럼 퉁퉁 부어오르지도 않는다. 한도경의, 정우성의 얼굴은 혹사당하고 상처 입지만, 절대 못생겨지지 않는다. 그저 상처 입고 피칠갑한 정우성의 잘생긴 얼굴일 뿐이다. 김성수 감독은 분명 한도경에게 가학적이지만 또한 정우성의 멋짐을 포기하진 않는다. 이러한 이중적 욕망은 [아수라]라는 텍스트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의 세상은 윤리도 희망도 없는 지옥도지만, 또한 이 파멸은 화려한 불꽃놀이를 통해 하얀 재를 남긴다. 그렇다면 영화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재만 남은 폐허인가, 불꽃놀이의 심상인가, 둘 다인가. [아수라]에 대한 다수의 혹평과,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들의 강력한 옹호는 영화의 이중적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의 문제처럼 보인다. [아수라]는 흔한 ‘알탕 영화’(최근 몇 년간 반복된 남초 한국 영화를 비하하는 말)인가, 이해받지 못한 수작인가.

[아수라]가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던 남초 영화에 대한 나름의 반성적 지평 위에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폭력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고발하자”는 김성수 감독의 발언([한겨레])처럼, 그 누구도 정의롭지 않은 영화 속 인물들의 폭력은 언제나 파괴적으로 그려진다. [베테랑]에서 정보를 캐기 위해 중고차 업주(배성우)를 구타하는 서도철(황정민)의 폭력이 정의롭고 유쾌하게 그려지는 것과 비교해 영화 초반 한도경이 정보원이자 심부름꾼인 작대기(김원해)를 구타하는 모습은 훨씬 잔인하고 비열하다. 호형호제하는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와 한도경, 한도경과 문선모(주지훈)의 관계가 사실 착취적인 관계라는 것도 남자끼리의 의리에 대한 허구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수라]는 풍자적인 텍스트가 아니다.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판타지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여전히 느와르 장르의 스타일을 따른다. 이것은 모순인가, 관습인가, 필연인가. [아수라]를 크게 호평한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오직 폭력과 악으로 점철된 영화 속 세계에 대해 “‘총체적 헬(조선)’에 대한 인식과 관점이 일관된 세계관으로 영화 전체를 지배하며, 그 모든 것이 느와르의 미학과 혼연일체를 이룬다”고 평한다. 극단적인 폭력의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악한 남자들이 건설한 폭력의 왕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며 여타 ‘알탕 영화’의 한계를 넘었다는 것이 [아수라]에 대한 성실한 옹호자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동시대 한국이 출구 없는 지옥처럼 느껴지는 건, 악으로 빼곡히 둘러싸여서가 아니라 그 악이 교활한 시스템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문제는 폭력의 폭력성이 아닌 권력이 가진 폭력의 세련됨이다. 검사가 두렵다면 맞을까 봐서가 아니라 형식주의적인 법치가 정의의 편이 아닐 수 있다는 학습효과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에게 구타를 지시하는 김차인, 직접 총을 들고 김차인과 한도경을 죽이는 박성배 등 [아수라]의 권력형 악인들은 잔인하고 직접적인 폭력에 중독된 모습을 보인다. 이 폭력의 전시가 피로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한국 사회의 피로함을 재현하거나 은유해서가 아니라 일차원적이라서다. 주사를 부리네? 병으로 이마를 깨자. 스폰서가 거치적대네? 차로 치어 죽이자. 말을 안 듣네? 이불로 덮어 죽도록 패자. 내가 너무 만만히 보이네? 유리컵을 씹어 먹자. 검사가 거치적대네? 총으로 쏴서 죽이자.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살육의 난장은 악의 무한계성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들 멍청한 선택을 해서 벌어진다. 김차인이 협상을 못해서, 문선모가 어정쩡하게 굴어서, 박성배가 그답지 않게 방심해서, 한도경이 스스로에게 도움도 안 되는 계략을 짜서 죽는 것뿐이다. 권력형 악인들이 이렇게 자기 파괴적인 행동만 골라 해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이것은 동시대에 대한 건강한 절망이 아닌 안일한 바람에 가깝다. [OSEN]은 ‘[아수라] 변명이 필요한 영화일까’라는 기사에서 “속 시원한 권선징악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아수라]의 지독한 현실반영은 배신일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 살육제는 권선은 몰라도 징악은 맞다. 징벌자는 감독이다. 모든 악인이 작정하고 판단 착오를 일으키는 작위적 상황에 몰아넣고, 김성수 감독은 각각의 몸을 빌려 칼춤을 춘다. 폭력적인 남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은밀하게 숨어 폭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남성 창작자의 욕망. 이 피날레가 불편한 건, 통쾌하지 않은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라서가 아니라 악인들의 공멸이라는 당위 안에서 감독이 마음껏 피칠갑한 이미지로 꾸민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남는 건 서사적 비극의 공허가 아닌 아무런 지시체도 없는 나르시시즘적인 비장미다. 하여 정우성의 상처 입은 얼굴은 파국을 품되 여전히 잘생겨야 한다.

그렇다면 [아수라]는 여전히 ‘알탕 영화’인가? 규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 있다. 일련의 한국 남초 영화들이 공유하는 남성성의 판타지가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하려는 제스처의 작품 안에서조차 징벌적인 폭력의 이미지로 재생산될 때 느끼는 피로와 환멸은 정당하다. 상당히 성실한 독해에도 불구하고, [아수라] 옹호자들이 작품에 대한 혹평을 다른 해석이 아닌 무지와 오해로 치부하고 영화 속 대사인 “좆이나 뱅뱅”을 되돌려주는(황진미) 방식은 이 피로를 가중시킨다. 작품에 대한 선의적 해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선의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것이 작품에 대해 악의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몇 년간 꾸준히 누적된 남성성 판타지를 이제야 인식하고 그 피로를 말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왜 이 작품의 이러이러한 선의를 보지 않느냐고 왜 이런 성취를 무시하느냐고 말하는 건 과연 해석의 차이일 뿐인가 실천적인 어깃장인가. 다시 말하지만 [아수라]에 대한 옹호가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이 해석의 지평에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관습에 대한 관대한 이해가 깔려 있으며, 이제 누군가는 그 지평 자체를 벗어나자고 말하는 것이다. ‘알탕 영화’라는 과격한 호명에는 더 나은 남초 영화에 대한 요청이 아닌 그 전제에 대한 부정, 변증도 허용되지 않는 부정이 깔려 있다. 너무 파괴적인가? 너무 과격한가? 부정 이후의 새 전망이 보이지 않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주인공이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되는 영화의 엔딩보다 더 파괴적이거나 덜 가망 없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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