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레터], ★★ 아직 다 쓰지 못한 편지

2016.10.19
뮤지컬 [팬레터]
창작 초연│2016.10.08. ~ 11.05│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작·작사: 한재은│작곡: 박현숙│연출 김태형│주요 배우: 문성일·김성철(세훈), 김종구·이규형(김해진), 고훈정·배두훈(이윤), 소정화·김히어라(히카루)
줄거리: 1930년대 경성. 잘나가는 사업가 세훈은 카페에서 죽은 여류작가 히카루의 소설이 출간된다는 소문을 듣는다. 감춰져 있던 그녀의 진짜 정체까지 밝혀진다는 이야기에 세훈은 히카루의 책을 출간하려는 소설가이자 문인들의 모임 칠인회의 멤버인 이윤을 찾아 유치장으로 향한다. 세훈은 출간 중지를 부탁하지만, 이윤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고 거절한다. 이어 히카루의 애인이었던 소설가 김해진이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까지 출간할 예정이라 자랑하는데, 세훈은 자신이 그 편지를 꼭 봐야만 하는 이유와 히카루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다.

★★ 아직 다 쓰지 못한 편지
경성 문인들의 사랑과 예술을 그린 뮤지컬 [팬레터]는 우수 크리에이터 지원사업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에 의해 발굴되어 그 막을 열었다.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었으나, 사랑도 예술도 어딘지 덜 여문 채다. 이 작품, 과연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의 강력하고 성공적인 선례가 될 수 있을까?

STRUCTURE: 팩션의 향을 내고자 한 픽션 뮤지컬
[팬레터]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천재 소설가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경성시대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에서 모티프를 얻어 당시 모던한 시대적 분위기와 예술가들의 삶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팩션 뮤지컬. 실명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를 모티브로 했는지는 비교적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문학사에 한 축을 자리한 이들과 엄혹한 시대상, 치열한 창작의 고통까지 이야기하는 데 있어 그만큼의 고민이 따랐는지는 의문이다. 문인들의 정체성은 당시 예술가의 전유물이던 ‘각혈’이라든지 혹은 소설 또는 시를 인용한 단편적인 대사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예술마저 점령당할 수는 없다”며 순수문학을 주창하던 문인들이 다음 장면에서는 김해진과 히카루의 스캔들에 환호하는 식으로 일관성마저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1930년대는 매력적인 시기다. 모던과 조선, 독립투사와 친일파가 공존했고, 문학, 음악, 무용 등 예술이 꽃피웠다. [팬레터]에서는 매력적이었던 그 시대의 향이 난다. 하지만 분위기만 입혔다고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의 완벽한 부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시대와 역사적 인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는 입증하고 납득시켜야한다. [팬레터]의 배경을 우리의 근현대사 중 아무 때를 골라 치환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CREATIVE: 그 많던 감각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대학로에서 가장 사랑받는 김태형 연출부터 한재은 작가, 박현숙 작곡가, 김길려 음악감독, 신선호 안무 감독에 이르기까지 [팬레터]의 크레딧에는 익히 알고 있던 창작진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그들의 이름이 주는 무게가 100% 발휘되었는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작품이 다듬어지는 프리뷰 기간의 특성과 작품의 여백이 남기는 상상력의 영역을 고려하더라도, 완성도에 대한 논쟁은 피할 수 없다. ‘예술에 대한 동경과 열망으로 시작된 교감과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는 신선하지만, 캐릭터들은 지극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그간의 감각적이고 정교했던 미장센도 소실된 채다. 덜컹거리는 무대 골조와 원고지를 레이저로 표현한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무대만이 남았다. 퍼커션, 첼로, 키보드, 기타로 구성된 넘버의 모던한 톤은 연주를 충실히 전달하지 못하는 음향의 한계와 복합된다. 보다 세밀하게 그려질 수 있었던 감정선은 강렬한 넘버를 따라 고조되거나 겉도는 채로 지속된다. 처음부터 김태형 연출과 한재은 작가, 박현숙 작곡가가 함께 만들어온 작품이라는 지점까지 오면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완벽한 정답은 아니겠지만, 단서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의 최종 지원작으로 선정된 3월에만 해도 [팬레터]의 시놉시스는 이랬다. “[팬레터]는 1930년대 시인 겸 소설가 이상과 소설가 김유정의 동반자살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뉴시스], [뉴스컬처], [아시아경제] 外) 작품의 근간부터 다시 세우기에 8개월은 너무 짧았다.

INCUBATION: 아직은 서툰 첫걸음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에 의해 최우수지원작으로 선정된 [팬레터]는 한국에서 본공연의 기회를 갖는 것은 물론, 앞으로 일본과 중국 등 해외 무대에서도 작품을 알리게 된다. 올해 초 쇼케이스로 첫 선을 보인 것을 돌이켜보면, 진행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그러나 공연 발굴에 있어, 신속한 개막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아니다. 성공적인 발굴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는 두산아트랩이나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모두 본공연을 올리기까지 보통은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공을 들인다. 대신 두 단체는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두산아트랩은 창작자의 자유를 보장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실험적인 무대를 완성한다. 한편 뮤지컬과 연극 부문으로 나뉘어 운영되는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는 뮤지컬에서 ‘리딩 공연’이라는 중간 지점을 선택한다. 날것 그대로의 공연을 관객과 만나게 함으로써, 존재는 알리되 발전 가능성은 열어두는 것이다. 빛을 보지 못했던 작품과 창작진을 발굴하는 인큐베이팅 사업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공연은 관객의 평가로 완성되는 만큼, 최대한 빨리 관객과 만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노력과 재능이 모여 완성되는 공연 예술은 보다 섬세한 과정이 요구된다.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공연을 마주하는 시각 자체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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