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겨울 음식][봄가을 음식][여름 음식]

2016.10.21

1980년 7월 31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이른바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강제 폐간된 172종의 정기간행물 중 [뿌리깊은 나무]도 있었다. 1976년 창간된 이 잡지는 영화, 광고, 방송, 출판, 가요를 아우르는 대중문화 비평 등 참신한 내용과,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채택하고 필자에 무관하게 모든 글을 우리말과 짜임새에 맞게 손질하는 등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로는 파격적인 편집으로 유명했다.

 

1984년, 후신 격으로 이번에는 여성지인 [샘이 깊은 물]이 창간되었다. 흑백 표지 등 참신한 디자인과 편집은 여전했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여자를 주체적 인간으로 상정한 창간 취지다. 1993년 100호 기념 인터뷰에서 설호정 편집주간은 여자의 지성을 깔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 의미의 가정은 해체되고 있으며,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창간사는 슬프게도 21세기에까지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겨울 음식], [봄가을 음식], [여름 음식]은 이 잡지에 실린 요리 꼭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준치국이나 굴비찌개처럼 생소한 음식도 있지만 닭찜, 부추부침개, 갈치조림처럼 요즘도 흔히 먹는 게 더 많다. 그러나 같은 음식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더덕 찜은 우리가 아는 빨갛고 매운 음식이 아니고 도라지, 고사리, 두릅 등 각종 나물과 미나리, 부추, 조갯살, 방앗잎을 넣고 간장과 된장으로 간을 맞춘다. 30년은 긴 시간이다. 사진 속의 오이와 무는 지금 것과 다르다. 쇠고기도 마블링이 없는 게 요즘과 다른데, 축산 기술과 소비자의 선호가 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쌈 채소도 케일이나 로메인 대신 우엉잎, 산씀바귀잎을 쓴다. 뿐만 아니라 [샘이 깊은 물]이 추구한 것은 당대가 아닌 이미 사라진 시대였다. 메밀묵을 쑤려면 맷돌로 메밀을 갈고, 양념한 대구는 석쇠에 올려 풍로에서 숯불로 굽는다. 그런 가정은 지금은 물론 80년대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책들은 요리책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풍속을 보여주는 역사책이 된다. 그리고 생생한 묘사로 읽는 사람의 미각을 자극하는 푸드 포르노이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에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떤 책들은 영원히 팔리기를 바라게 된다. 이 책들의 초판은 1989년에 나왔다. 내 책은 2006년에 나온 초판 6쇄인데 아직도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 가능하다. 30년 가까이 절판되지 않은 것이 놀랍지만 여전히 판이 바뀌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다. 실용서가 개정 없이 오랜 기간 쇄만 거듭되는 것은 보통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요리책이 아닌 미시사책이 되어버린 이 책들은 오히려 이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주술이 딱 떨어지고 지시 대상이 명확하며 정확하게 종결되는, 어찌 보면 유려한 번역문 같은 아름다운 문장도 읽는 즐거움을 준다.


정은지
책과 음식과 쇼핑에 관한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책과 음식을 쇼핑한다. 책 속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썼고, [아폴로의 천사들]·[피의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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