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러그드 보이]를 20년 만에 다시 읽었다

2016.10.20
“만약에 현겸이가 날개가 돋아서 날아가버린다면… 난 너무 슬퍼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허무맹랑한 걱정이지만, 그때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먹만 한 얼굴에 여드름은커녕 모공조차 보이지 않는 피부, 180cm가 훌쩍 넘는 키 등 누구든 뒤돌아보게 할 정도의 뛰어난 비주얼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플러그드 보이]의 주인공 현겸이는 천계영 작가가 밝힌 대로 ‘언플러그드’한, 그러니까 초등학생 독자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고 해맑은 열여섯 살 소년이었다. 어렵게 마음을 고백한 지율이에게 태연히 “너 좋아해. 당연하잖아”라고 대답한 후 강아지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지율아, 나… 강아지도 너무 좋아”라고 덧붙이거나, 우연히 자신의 헐벗은 상체를 보고 부끄러워하는 지율이에게 “이상해. 내가 벗었는데 왜 네가 부끄러워해? 내가 옷 입으면 네가 따뜻할 거야?”라고 투덜거렸다. 현실은 물론 순정만화까지 통틀어도 현겸이만큼 무해한 남자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남모를 고통과 외로움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것이 도리어 매력의 일부로 비춰지는 남자 주인공들은 많았다. 너무 잘난 나머지 상대방을 깔보거나 괴롭히다가 의도치 않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현겸이에게도 나름의 괴로움이 있었고, 외모로 따지자면 어떤 순정만화의 주인공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는 결코 기분 내키는 대로 남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평가하지 않았다. 누구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누구도 흉내 내지 않는 소년의 탄생. 그래서 [언플러그드 보이]는 현겸이와 지율이의 로맨스를 그리는 동시에, 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 것인가를 말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나이답지 않게 심하게 순진하고, 긴 머리 가발을 쓰는 등 제멋대로 옷을 입으며, 슬플 땐 엉성한 동작으로 힙합을 추는 현겸이는 대부분이 말하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식과 속도가 있고, 중요한 건 그것을 찾고 지켜내는 일이다. 우연히 키스신이 등장하는 19금 영화를 함께 보던 현겸이와 지율이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몇 살이 되면 봐도 되고 몇 살이 되면 해도 되는 그런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지….” ‘자기가 정하는 거야, 현겸아.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중학생이 되어 읽은 천계영 작가의 [오디션] 역시 결국은 그런 이야기였다. 인물들이 음악으로 경쟁한다는 아이디어도 획기적이었지만, 매번 다음 권, 또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렸던 가장 큰 이유는 서로 겹치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온몸 구석구석 피어싱을 하고 나이키 대신 반달무늬를 몸에 새긴 베이시스트 장달봉, 여성으로 오해받을 만큼 늘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소유자인 드러머 류미끼, 자신이 ‘베레베레베레’라는 이름의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컬 황보래용 등 재활용밴드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현겸이보다도 훨씬 괴상했다. 이들을 모으고 기획한 두 여자, 박부옥과 송명자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들로서 전자는 괄괄한 성격의 사립탐정인 데다 후자는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장미꽃을 머리에 달거나 레이스가 어지럽게 수놓인 옷을 입고 등장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나름대로 악역인 변득출은 탐미주의자 남성으로, 하이힐을 즐겨 신으며 공작새의 날개 같은 옷 혹은 새 둥지 모양의 머리장식을 착용하고는 했다. 그들 중 [오디션]이 끝날 때까지 자신을 바꾼 인물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이란 뭘까요? 천계영 작가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끊임없이 눈앞에 들이밀며 질문했다. 직접적인 단어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동성 연인이었던 류미끼와 추범구의 스토리를 만남부터 이별까지 제법 큰 비중으로 디테일하게 다룬 과정 또한 이것은 왜 정상이 아니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동성이라는 이유로 고민하거나 그 때문에 관계에서 갈등을 빚는 일은 여기에 없다. 첫눈에 반하고 자연스레 사랑하고 헤어지는,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 어떤 설명도 변명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그려질 뿐이다. 천계영 작가의 세계 안에서 흔히들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뭉툭한 이분법은 무력하다.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 역시 세상의 기준과 상식을 배우고 거기에 발을 맞추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황보래용이 외계인이라는 거짓말을 거두고도 남들과 조금 다른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됐듯, 성장은 각자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최근 몇 년간,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배울수록 오래전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보기가 괴로웠다. 본방을 보고도 재방, 삼방까지 챙길 정도로 열광했던 드라마도, 무심코 따라 불렀던 노래들도 그땐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실망스럽기만 했다.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거나 여자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하나하나 예민하게 따지다 보면,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다행히도 천계영 작가의 데뷔 20주년을 맞아 다시 꺼내 본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앞선 메시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에서든 픽션에서든 비슷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점점 더 자주 반복되고,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중요해진다. 오래전, 두 만화를 보며 십 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두 만화를 보며 고민할 수 있는 건 그보다 더 큰 행운이다. 세상의 무례함에 지치거나 둔감해지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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