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왕] 백승화 감독 “만복이가 경쟁의 레인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선택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6.10.31
선천적 멀미증후군 때문에 차를 타지 못하는 소녀가 있다. 덕분에 매일 왕복 4시간을 걸어서 통학하는 그에게 담임선생님은 제안한다. 너에겐 육상이 딱이라고. 단지 많이 걷는다는 이유로 경보를 시작하게 된 고등학생 만복(심은경)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걷기왕]은, 하지만 쓸모없어 보이던 재능으로 ‘왕’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왜 걷는 것조차 빨라야 하느냐고, 왜 ‘걷기왕’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 작품이다. 이 느슨한 위로를 전하는 건 첫 장편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서 자유분방한 인디 록밴드들의 삶을 담아내며 화제를 모았던 백승화 감독이다. 적극적으로 막 살던 어떤 청춘들의 초상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 [걷기왕]에선 ‘적극적’이란 태도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며 이것은 왜 꿈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과연 그의 생각은 왜 어떻게 변화한 것일까. 한 성실한 창작자가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변화시키는 궤적을 함께 복기해보았다.

* 영화 [걷기왕]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번 [걷기왕]은 극영화로서는 첫 장편 연출작이다.
백승화
: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 개봉할 때만 해도 영화도 그렇고 나 스스로도 톤 앤 매너에 록스타의 허세 같은 게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소심해지고 이것저것 많이 달라지더라. 영화 자본이 들어간 작품인 만큼 상업적 성공에 대한 책임감도 더 크고, 대중에게 더 많이 읽힐 수 있는 문법도 고민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에서도 촬영 중에도, 후반 작업에서도 그런 선택을 해야 했다. 더 대중적인 이야기, 더 많은 사람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것들. 주인공 만복과 수지(박주희)의 갈등이 고조되는 후반부는 더 무겁게 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가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내가 그런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발랄하고 유쾌한 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사 역시 주제를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길 바랐고.

가령 만복이 전국체전에서의 마지막 경주를 포기하고 자기 입으로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을까?”라고 굉장히 직접적으로 주제를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백승화
: 고민을 많이 했다. 우선 앞서 말했듯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 너무 직접 얘기해주는 면도 있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내부 시사를 할 때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해당 내레이션뿐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그런 노력들을 하려 했다. 조금은 오글거리는 대사였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꼭 다 빨리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응원의 메시지에는 동의하지만, 당장 현실을 겪어내야 하는 이들에겐 이것도 자칫 무책임한 위로가 될 수 있다.
백승화
: 우선 엔딩을 처음부터 정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말은 만복이가 대회에 나가 발을 절뚝이면서 꼴찌라도 완주를 해내는 것일 텐데, 영화의 주제를 고민하고 보조 작가와 상의하면서 완주를 하지 않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한 번 하니 다시는 완주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없더라. 그러면서 만복이가 경쟁의 레인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선택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상황에 대한 내레이션도 원래는 “완주하지 않았다”였는데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로 바꿨다. 완주를 했다 안 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더는 달리고 싶지 않고 나는 달리지 않겠다는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 부분에서 분명 현실적으로 경쟁을 거부했다고 해서 다들 집에 누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선택 이후 만복이가 일상으로 돌아와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수지(박주희)와 함께 도보 여행을 가는 결말을 만든 건데, 스스로는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결말이다.

만복이가 경주를 그만둔 것과는 별개로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백승화
: 이 친구가 선천적으로 멀미가 심한 캐릭터로 설정되었는데 이걸 꼭 극복해야 하나, 싶었다. 보통 청춘영화에선 어떤 장애를 극복해내야 하지 않나. 나는 굳이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수지나 친구인 지현(윤지원)의 미래 모습이 나오는데, 만복이의 미래는 거기 넣지 않았다. 그건 열려 있다. 사실 영화 속 사건으로 그의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다. 다만 크게 달라지진 않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만복과 수지의 서울 도보행이 성장을 위한 모험과는 거리가 먼, 갈등의 폭발로 그려지는 것도 그래서일까.
백승화
: 일단 한 번 경보를 그만두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만복이 다시 경보를 하고 전국대회에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 어떤 과잉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멀미 때문에 차를 타고 나갈 수 없는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 대회 출전을 위해 서울까지 걸어가는 거였다고 봤다.

그 과잉된 상태라는 것이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부분일 텐데.
백승화
: 일단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하는 과정이나 그 마음가짐은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요하기도 하고 멋진 일이지. 다만 만복이가 빠진 과잉된 감정은 스스로 자신의 꿈을 선택해서 노력한 것이라기보다는 주위의 압박, 꿈을 가지라는 강요,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두려움 위에서 만들어졌기에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압박은 학생 때뿐 아니라 사회 나가서도 항상 존재하지 않나. 얘는 어느새 뭐가 되었는데 나는 뭐지? 뭐든 해야 하지 않나? 또 TV에 성공한 명사들이 나와서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좋은 동기부여가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칫 냉소나 자책에 빠질 수 있다고 봤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사람들을 스스로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에 과잉으로 이끄는 게 있다고 보다.

그렇다면 [걷기왕]의 만복을 통해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나, 유독 그런 시스템에 내몰린 동시대 십 대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싶었나.
백승화
: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부분이 있다고 보지만 분명 전자와 후자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생 땐 단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대항해 자기만의 꿈을 가지는 게 큰 미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영화 속의 담임선생님(김새벽)이 9급 공무원은 왜 꿈이 아니냐는 지현에게 말하는 그럴싸한 꿈, 진짜 꿈, 네 안에 진짜 무언가 있을 거라는 그런 말들. 그런 이야기가 우리 땐 청춘으로서의 미덕으로 다뤄졌고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지금 세대에겐 그조차 하나의 압박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이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긴가민가하고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이런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다.

남들이 안 가는 애니메이션학과를 선택했던 시절의 본인이라면 지현 같은 친구를 어떻게 봤을 것 같나.
백승화
: 예전이었다면 나도 담임선생과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다. 그런 거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이 자긴 하고 싶은 게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면 빨리 그걸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나름의 우월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더 깨인 사람 같고. 분명 그땐 남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우쭐함이 있었다.

그런 인식이 어떻게 변하게 된 건가.
백승화
: 딱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전에는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걸 이제는 사회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가령 나보다 젊은 세대에 대해 우리 때보다 냉소적이다, 비관적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왜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는지 그 배경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살펴보면 실제로 그들이 낙관적일 수 있는 이유가 별로 없는 거다. 고성장 시대도 끝났고.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찍을 때만 해도 음악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개인들에 집중했었다면 이제는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보편적 가치 같은 것들을 더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면 [걷기왕]을 찍으며 예술가로서 표현의 욕구와 사회적 메시지를 발화하고 싶다는 욕구 중 무엇이 더 컸나.
백승화
: 반반인 것 같다. 다만 분명 예전보단 메시지라는 부분을 더 고민하긴 했다.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에 희열과 만족감을 느꼈다면, 요즘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창작물이 뭘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서의 태도를 반성하게 된 것도 있고. 가령 영화에 나오는 뮤지션들이 술자리에서 여성을 상대로 혹은 카메라를 향해 야한 농담이나 이런 걸 하는데, 당시에도 GV에서 그런 성적인 발언들이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나한테 그 얘길 하지, 싶었다. 나는 그냥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실제로 벌어진 일들을 솔직하게 담아낸 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 장면을 골라 붙인 것도 나의 선택이고, 그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불쾌함에 대해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촬영 현장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 매뉴얼을 공유한 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는데, 그런 올바름을 과정에서부터 추구하고자 한 걸까.
백승화
: 시나리오를 쓰면서 보조 작가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도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며 그런 부분에서 힘든 게 있었고, 그 친구도 현장에서 스크립터로 참여하면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우리 현장에선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예방 교육 같은 이야기가 나왔고. 실제로 완벽하게 지켜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장에서 감독의 자리라는 건 분위기를 최대한 핸들링할 수 있는 자리니까.

최근 1, 2년 사이 페미니즘이 대중적 이슈가 된 것도 영향을 끼쳤을까.
백승화
: 분명 그런 이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긴 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만, 가장 큰 건, 앞서 말했던 솔직함의 문제 같다. 사실 예술가라는 사람들에게 솔직함이라는 게 마치 명분처럼 사용될 때가 있다. 인디 신에서도 그렇고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고. 하지만 그중 어떤 건 솔직한 게 아니라 무례한 거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이 그 행동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 솔직함이 그냥 솔직한 가해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결국 창작윤리 이야기인 건데, 그것은 창작자라는 직업의 문제 같나, 더 어린 세대에게 책임이 있는 어른의 문제 같나.
백승화
: 어른의 책임이라는 게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게 굉장히 어렵다. (웃음) 어른으로서 어린 세대를 대하는 것보다 나와 다른 사람과 다른 가치관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더 고민하는 것 같다. 흔히 기성세대라는 말을 하는데, 기성세대가 문제라면 자신이 몰랐던 가치나 새롭게 만들어진 가치가 있을 때 자신이 잘 모르니 인정하지 않아서라고 본다. 그건 게으른 거 아닌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꼭 어린 세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앞서 말한 페미니즘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좀 더 열린 태도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분명 [걷기왕]은 긍정적이고 바른 이야기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도입부에서 쓴 ‘이 빌어먹을 나라’라는 표현은 지금도 유효한가.
백승화
: 록스타 같은 말을 하고 싶어 쓴 문구이긴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는 생각한다. [걷기왕]에서 만복이에게 자꾸 사람들이 도전하라고 열정을 가지라고 하고, 그냥 걷기만 해도 되는데도 걷기 선수가 되라고 하는데, 사실 그건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 아닌가. 그건 만복이에게도 필요한 거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거라고 보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빌어먹을 나라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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