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_내_성폭력│③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아주 최소한의 가이드

2016.11.01
한국에서 성폭력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관계에서나 발생하지만 막상 자신이나 주변인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어디에 먼저 찾아가야 할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비용과 시간은 얼마나 들까?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꼬리를 잇는 질문들을 떠올리며 준비했다. “성폭력 사건은 100개면 100개의 다른 사건이다. 어느 하나도 전형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되, 누구나 알고 있으면 유용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긴급한 상황에서 구조나 보호가 필요하다면 국번 없이 여성긴급전화 1366(24시간 상담)으로 연락할 수 있다. 사건 이후 혼자 고민하고 있다면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이하 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이하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해 전국에 161개의 성폭력상담소가 있으니 일단 전화를 걸어 보자.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관계를 간단히 메모해두면 상황을 설명하기가 다소 수월해진다. 상담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라 면접상담을 결정하거나 법률 및 의료 지원에 대한 도움을 받으면서 상담자와 함께 사건해결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발간한 [보통의 경험]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DIY 가이드’로, 성폭력 유형별 대응책, 다양한 해결 방식과 절차, 피해자 지원 기관 연락처 리스트 등 필요한 정보들이 꼼꼼히 담겨 있다.

법적 대응은 어떻게 시작할까. 
형사고소, 민사소송, 혹은 둘 다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해본다. 법률적 조언을 받았는데 기소 가능성이 낮은 사건의 경우, 일단 손해배상을 받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라면 민사소송만 바로 시작할 수도 있다. 형사고소의 경우 변호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반면, 민사소송이나 2심 이상 재판이 계속 진행되는 경우에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 민사소송에서는 성폭력 피해로 인해 직장을 잃었거나,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정불화가 생긴 문제 등에 대한 금전적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 또한, 사법적 해결을 준비한다면 무고나 명예훼손 등 역고소 가능성에 대한 검토도 해둘 필요가 있다. 

피해자는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까. 
다수의 성폭력 사건이 단 둘이 있을 때 발생한다. 피해자가 충격으로 인해 증거를 채취하기 전 몸을 씻거나, 문자 메시지 및 메일 내역을 지워버려서 증거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피해 당사자의 일관된 진술이 중요하므로 너무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사건을 시간 순으로 기록한 일지, 상해 진단서, 사진, 대화 내용 녹음 파일과 녹취록, 문자 메시지 및 메신저 대화 내역 등을 확보하자. 가해자의 평소 행동에 대해 증언하거나 진술서를 써 줄 수 있는 주변인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해당 가해자로 인해 복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확인해보고, 있다면 연락을 취해 공동 대응하는 것이 좋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수법으로 가해가 이루어진 경우 진술의 신빙성도 높아지고 가해자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다.

돈이 없어도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 
변호사 상담비용은 30분에 5만 원에서 20만 원 이상까지 천차만별이다. 어디로 찾아갈지 검색을 통해 찾을 수도 있지만, 한 변호사는 포털사이트 등에서 적극적으로 광고를 하는 ‘성폭력 전문 변호사’는 가해자 변호 전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성폭력은 전문성이 높은 분야이므로 성폭력 상담소를 중심으로 연계된 변호사들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에서는 전화 상담을 통해 사전예약을 받아 매주 정해진 요일에 오프라인 무료법률상담을 진행한다. 성폭력상담소 자문이나 지원을 맡고 있는 변호사 그룹에서 상담을 진행하며, 피해자가 변호사 선임을 원하는 경우 상담소를 통해 소개받을 수도 있다. 직장 내 성폭력의 경우 한국 여성노동자회나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에서 무료로 법률상담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성폭력 · 아동학대 범죄 피해자는 경찰서, 검찰청 피해자지원실이나 상담소 등을 통해 피해자 국선변호사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또한 기준 중위소득 125% 이하인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는 대한법률구조공단, 대한변협법률구조재단에 무료법률구조를 신청할 수 있다. 

민형사상 소송 외의 방법도 있을까. 
모든 공공기관과 학교는 여성가족부 고시에 따라 성희롱 상담 및 고충처리를 위한 전담창구를 반드시 설치 및 운영해야 한다. 즉 조직 내 양성평등센터, 성폭력상담센터, 고충처리기관 등에 피해 사실을 신고할 수 있지만, 강제력이 없는 고시이다 보니 전담창구를 두지 않은 기관도 많다. 학회나 시민단체, 동호회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거나 가해자가 해당 조직의 구성원인 경우 내규를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 최근 한국시인협회는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회원들의 혐의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정관에 따라 자격정지와 제명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꼭 성폭력에 대해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품위를 손상시킨’ 경우에 대한 징계 조항이 있다면 제소할 수 있다. 피해에 대한 사실관계와 요구사항, 답변을 원하는 기한 등을 적어 내용증명으로 발송하면 좀 더 공식적인 자료가 된다.

상담이 계속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전문가는 “가능하면 사건 발생 한 달 이내에 어떤 식으로든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우선 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전화 및 면접 상담을 받아보고, 심리 상담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이 계속 필요한 경우에는 성폭력상담소에 연계 단체 및 병원 리스트가 있는지 문의하자. 심리상담의 경우 비용은 프로그램 및 상담 방식에 따라 시간당 6, 7만 원 대에서 20만 원이 넘는 곳까지 다양한데, 중요한 것은 성폭력 및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비용이 걱정된다면 의료 지원에 대해 알아보자. 성폭력 피해자는 국가로부터 산부인과적, 외과적, 정신과적 치료비, 심리상담 및 진단서 발급비를 지원받을 수 있으며 해당 지역 성폭력 상담소 또는 시청, 구청에 신청할 수 있다. 이미 지출한 의료비 역시 추후에 서류를 갖추어 신청하면 돌려받을 수 있다.

정신과 상담은 어떻게 시작될까.
초진에서는 대개 우울검사, 불안검사 등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하는데, 각 검사마다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2만~6만 원 선의 진료비가 든다. 그 이후로는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건강보험 적용 하에 2만 원 안팎의 비용을 예상할 수 있다. 환자가 비보험을 원하는 경우 2.5~3배 정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초반 진료로 진단을 하게 되면 의사는 환자와 함께 약물치료, 상담치료, 두 가지의 병행이나 정밀심리검사 등 여러 방식으로 치료 계획을 세워 진행한다. 초반 2~4주가량의 진료는 대개 위기중재(crisis intervention)부터 이루어진다. 피해자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공감하고 지지해주고 안심시켜주고, 우울증이나 불안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을 처방하기도 하며, 식사나 수면 등의 생활에 대한 케어를 돕기도 한다. 대개 1주일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하고, 짧으면 15분에서 길면 45분가량 진료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시간에 따라 상담료가 다르게 책정되어 있지만 편차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정신과 방문 기록이 알려져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은 두 군데 남게 되는데 첫째, 병원 차트의 경우 병원을 옮기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본인이 원하면 복사해 갈 수 있다. 다만 본인만 할 수 있다. 둘째, 건강보험공단 보험료 지급 내역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조회 및 열람이 불법이므로, 정신과 상담 기록이 사측에 알려져 취업 등에 불이익을 끼친다는 것은 일종의 도시전설이라고 한다. 좁은 지역이거나 기타 이유로 정신과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에 가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원내 처방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가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의약분업 예외구간이기 때문에 병원 내에 약제실이 있어 바로 약을 받아갈 수 있는 곳이 약 70% 이상이다. 

오래 지난 일인데 혼자 묻는 게 낫지 않을까.
어린 시절, 혹은 오래 전에 겪은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 신원도 알 수 없거나 이미 연락이 끊긴 경우도 많아 어떤 처벌도 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게 무의미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러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길을 택하곤 하는데, 상처를 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다 쏟으면서 점점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난 일일수록 의사나 상담사 등과 함께 자신의 기억, 감정과 마주하고 토로하며 스스로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피해자 자조모임을 찾아가는 방법도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1년에 한 번 ‘큰 말하기 대회’를, 3월~11월 마지막 주 수요일 ‘작은 말하기’ 모임을 주최한다. 홈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작성 후 미리 신청할 수 있고, 안전한 장소에 모여 각자의 경험과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또한, 2013년 6월 19일부로 성폭력범죄에 대한 친고죄는 폐지됐으며 2010년 기준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은 피해자가 성년이 된 날부터 공소시효를 다시 계산하게 됐으니 관련 법 조항을 참고해 법적 대응을 준비할 수도 있다.

피해자 주변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심리적 지원은 물론 피해자들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수입이 끊겨 생계가 어려워진 경우 다른 일을 소개해주거나 금전적 지원을 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상담센터 예약을 도와주거나 직접 데리고 가는 것도 좋다.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들이 병원을 찾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하듯,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지쳐 있는 피해자의 경우 ‘가야지’라고 말은 하지만 막상 혼자서는 발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피해자의 동의를 받아 대신 전화 예약을 하고, 동행해서 진료를 받게 한 뒤 ‘잘 왔다’고 격려해주는 등 불안감을 나누고 심리적 진입 장벽을 낮추도록 돕다 보면 피해자 스스로 치료 사이클에 안착하게 될 수 있다. 또한, 보호자 상담을 받아 피해자의 상태를 더 잘 파악하고 어떻게 돌봐줄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활동인 ‘첫사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재판동행, 재판 모니터링 등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정책적인 변화까지 이끌어내도록 노력하는 모임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다양한 자원 활동(아카이브 구축, 해외자료 검색 및 수십, 쉼터생활인에 대한 학습지원)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성폭력상담소 정기후원회원으로 가입한다면 지속적으로 힘을 보탤 수 있다. 지난 달 경남 지역에서는 가정폭력·성폭력 상담소를 운영하던 50대 소장이 인건비 지급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유권자로서 성폭력 예방 정책 및 관련법 제정 등에서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액션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 공동체 안에서의 성폭력에 대해 인식하고, 가해가 지속되지 않는 방안을 찾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자문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
마인드맨션의원 안주연 원장

참고도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보통의 경험] 이매진
하혜숙 [성희롱 성폭력 상담자 가이드] 학지사




목록

SPECIAL

image 알쓸신잡

MAGAZINE

  • imageVol.169
  • imageVol.168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