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의 색깔은 무엇일까

2016.11.07
블랙핑크는 신곡 ‘불장난’에서 “두려움보단 널 향한 끌림이 더 크니까”, “내 전부를 너란 세상에 다 던지고 싶어”라고 노래한다. 뮤직비디오에서도 남성의 허리를 먼저 감싸거나 다가오는 남성을 힘껏 껴안는 등 머뭇거리지 않는다. 2016년 걸 그룹의 트렌드는 닿을 듯 말 듯 한 사랑의 설렘과 수줍은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블랙핑크는 거기서 살짝 벗어난 길을 선택했다. 이는 2NE1부터 블랙핑크까지 YG 엔터테인먼트(이하 YG) 걸 그룹의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테디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2NE1은 데뷔 때부터 걸 그룹으로는 이례적일 만큼 자기애를 과시하는 팀이었으며, 잘 놀거나 매사에 과감할 것 같은 이들의 이미지는 블랙핑크에도 상당 부분 이식돼 있다.

그러나 블랙핑크가 ‘붐바야’에서 “오빠”를 외쳤듯, ‘불장난’ 역시 수동적이고 얌전하며 어린 여성의 얼굴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불장난’에는 “우리 엄만 매일 내게 말했어”라는 가사가 등장하고, 뮤직비디오 사이사이에는 수수해 보이지만 은근히 노출이 부각되는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더블 타이틀곡 ‘STAY’는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으로, 다소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 있는 지고지순한 여성의 분위기를 보강한다. 2NE1이 ‘Fire’나 ‘내가 제일 잘 나가’와 달리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아파하는 여성의 노래를 중간중간 발표하며 ‘세 보이는’ 이미지를 중화시키려 했던 전략과 유사하다. 때문에 트와이스와 블랙핑크가 추구하는 방향의 본질적인 차이는 아주 미세한 정도에 그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트와이스에 비해 후발주자인 블랙핑크의 색깔은 그만큼 애매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2NE1과 블랙핑크의 차이이기도 하다. 블랙핑크는 2NE1과 비슷한 느낌을 부여받았지만, 2NE1의 콘셉트에는 멤버들의 색깔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CL의 튀는 캐릭터나 다리를 찢는 공민지의 춤 같은 임팩트가 없었더라면 ‘Fire’는 완성될 수 없었다. 반면 블랙핑크는 YG가 2NE1을 통해 보여준 것에 요즘 걸 그룹의 흐름을 섞되, 정작 멤버들 개개인의 개성은 부각하지 않는다. 데뷔곡 ‘휘파람’에서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로제의 보컬이, ‘붐바야’에서는 리사의 패기 넘치는 랩이 도드라졌지만 ‘불장난’에서는 오히려 멤버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조율해버리기까지 한다. 전반적으로 호흡을 많이 섞지 않고 단단하게 힘주어 내뱉는 톤은 자세히 듣지 않으면 제니와 지수, 로제, 리사 중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블랙핑크는 최근 인터뷰에서 “팬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소통의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 팬들과 만나는 자리, 음악방송도 다 나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트와이스와 I.O.I 모두 데뷔 전부터 리얼리티쇼를 통해 캐릭터를 보여주었고, 결국 개개인의 특성을 동력 삼아 범대중적인 성공까지 기세를 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블랙핑크에게는 공식적으로 촬영한 몇 개의 뮤직비디오 비하인드 영상이 있을 뿐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데뷔 후 3개월이 지나는 동안 멤버들에게 개성을 드러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2NE1이 Mnet [2NE1 TV] 등을 통해 당시 걸 그룹과 차별화된 캐릭터를 갖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뭄바톤 계열의 ‘불장난’을 타이틀로 내세운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뭄바톤은 세계적으로 트렌디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낯선 장르고, 그만큼 무엇을 해도 응원받을 정도로 견고한 팬덤을 가졌거나 익숙지 않은 음악조차 매력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멤버 개개인의 이미지가 또렷하지 못한 신인에게는 소화하기 힘든 옷이다. 흔히 트렌디하다고 여겨지는 YG의 이미지를 제외하면, 겨우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블랙핑크가 뭄바톤 장르의 타이틀곡을 불러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게다가 ‘불장난’의 무대는 인상적인 한순간을 그려내지도 못한다. 최근 아이돌 시장에서 한 장면으로 요약할 수 있는 퍼포먼스 연출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트와이스가 ‘CHEER UP’에서 보여준 “샤샤샤”나 손가락으로 ‘T’ 모양을 만드는 ‘TT’의 안무, 여자친구가 ‘유리구슬’에서 보여준 발차기 등과 비교해볼 때 ‘불장난’을 대표할 만한 안무는 떠올리기 어렵다. ‘불장난’이라는 단어는 ‘TT’나 ‘너무너무너무’만큼 특정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표현하지만, 제목의 강렬함이 콘셉트의 전부를 대체하는 건 아니다.

2NE1이 데뷔했을 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시선을 끌 수 있는 여성의 캐릭터는 당시 YG만이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의 블랙핑크는 어떤 여성상을 그리고 싶은지 알 수 없다. 트렌디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음악과 그럭저럭 세련된 비주얼 스타일링은재하지만, 거기서 부각되는 것은 YG라는 회사일 뿐 정작 블랙핑크라는 팀과 그 팀을 이루는 멤버들의 개성에 관한 고려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기획사와도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아티스트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냈던 YG는 이제, 유행을 따라가기만 해도 YG의 이름과 규모로 시장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트와이스가 ‘TT’에서 수동적인 여성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벗어났듯 다른 걸 그룹들도 변하기 시작한다. 시장의 요구와 시대의 흐름과 회사의 고집 사이에서 아직 적절한 선을 찾지 못한 블랙핑크는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까? 블랙핑크뿐 아니라 모든 걸 그룹이 고민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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