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빠진 나라│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보다 오래된 병

2016.11.08
지금 한국에서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블랙홀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 씨가 국정연설에까지 개입한 것을 대통령이 일부 시인하고 사과를 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모든 뉴스를 빨아들였으며, 모든 관심을 빨아들였으며, 콘크리트 같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빨아들였다. 이슈의 출발점이었던 미르 재단의 부정 축재뿐 아니라, 개성공단 폐쇄, 평창 동계올림픽 비리, 한진해운 정리 등 지난 몇 년간 국가적으로 가장 굵직한 이슈들까지 최순실과 연결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부조리도 그를 향해 소급해 들어갔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 자리에는 정서적 진공이 남았다. 한창수 고려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서 현재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학문적으로 보기보다는, 지금은 사실 황당한 멘붕 상태”이며 “화가 나서 어떻게 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느낌”이라고 정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졌던 이들에게조차 작금의 상황에선 또 다른 상실감을 느낀다. 최소한의 합리주의적 언어로도 번역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합법적으로 뽑힌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장악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민주화 운동으로 꽤 견고하게 쌓아왔다고 믿어왔던 근대적 이성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경험을 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나라에 난 거대한 상처가 아니라 어둠과 허무만 남긴 거대한 구멍이다.

이 불가해한 어둠은 지금 이곳의 부조리를 끔찍한 추문으로 만들어버린다. 흔히 최 씨를 러시아의 요승 라스푸틴에 비유하지만, 제정 러시아의 몰락을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으로 요약해버린다면 당시의 근본적인 모순과 문제들은 오히려 지워질 것이다. 만약 공허를 넘어 실천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최순실의 이름을, 그럼에도 의도적으로 쓰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제목인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불가해한 사건이었던 파리 테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불가해함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테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건을 재구성하려 했다. 그의 출발점은 “인간이 행한 것 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원칙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한 원칙이다.

현 사태에서 드러난 가장 외면하고 싶은 치부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의 균열이다. 단순히 자격 미달의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뜻으로서의 균열이 아니다. 경기 회복에 대한 국민의 의지를 대신하겠다며 4대강 사업에 수십 조 단위의 혈세를 부어 미래 세대까지 피해를 입을 환경오염을 이뤄낸 이명박 대통령이 최악의 대통령으로서 박근혜보다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러선 그 대의가 과연 누구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붕괴다. 근대의 병폐가 아닌 전근대다. 우리가 상상했던 ‘헬조선’이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계급 이동이 차단된 재봉건화된 사회였다면, 실제로 확인된 건 정치적 봉건사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당연히 대통령 본인에게 있지만, 그것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을 설명하진 못한다. 이것은 대통령과 그 옆의 사람을 욕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도, 또한 그 대통령을 뽑은 51.6%의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대신할 문제도 아니다. 잘 뽑은 대통령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주친 구멍을 직시하는 대신 가장 쉽고 빠르고 안온한 방식으로 위로를 얻는 달콤한 기만이다.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는 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사이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시민들의 부단한 참여와 간섭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총선과 대선이 겹쳐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극도로 높아졌던 2012년에조차 정치적 참여란 [나는 꼼수다]로 상징되는 사이다 정치 평론을 소비하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 사회적 책임과 연대라는 근대의 기획이 진지하게 다뤄지진 않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은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정말 훌륭한 제언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조차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특정 정당과 인물에 대한 팬덤적인 지지와 그 반대편에 대한 극렬한 증오는 자율적 시민들의 연대와 협업을 위한 공동선에 대한 합의와 합리적 논증대화의 기반을 망가뜨린다. 앞서 이번 사태가 정치적 봉건사회를 보여준다고 했지만, 과연 우리는 그 전에 근대성을 내면화한 경험이 있긴 한가. 진보라는 말에는 환호하면서도 계몽이란 말에는 반감을 드러내는 건 얼마나 기만적인가.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저서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에서 “정치적 평등을 향한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 감정적인 충동 내지 정서적인 추동력이 무엇이든, 그런 성취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정서적·인식론적 자원을 끌어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광화문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친 촛불 시위는 시민들이 감정적 공허함을 극복하고 분노를 정치적 구호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분명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조기 대선을 통한 더 괜찮은 대통령의 취임으로 해결된다고 믿으며 마무리된다면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최근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있다면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며 학교의 권학유착을 끈덕지게 파고들다가 박근혜 정권의 실세까지 드러내버린 이화여자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들일 것이다. 공동의 문제의식 안에서 서로를 벗이라 부르며 연대하고 토론하고 졸업생들의 재능 기부 등으로 일상의 결을 포기하지 않은 그들의 투쟁은 총장이 사퇴한 뒤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각각의 개성을 지운 우리로서의 투쟁이 아닌 자율성을 가진 개개인이 공동선 안에서 연대하는 이러한 모델은 우리에게 많은 힌트를 준다. 이번 사태가 가르쳐준 게 있다면, 이미 선취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민주적 가치들이 사실은 그냥 개념으로 존재했을 뿐이며 그것은 결국 책임 있는 실천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다는 것이다. 하여 이 실천은 비합리적 권력에 대한 반대를 넘어 합리적인 것에 대한 재구성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수많은 합리주의적인 도덕을 재구성하고 용기 있게 발화하고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저 텅 빈 구멍을 겉만 가리지 않고 안에서부터 메울 수 있다. 지금 방관하는 자 모두 유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허무를 넘어서고 싶다면, ‘헬조선’ 이후를 상상하고 싶다면, 다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없었던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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