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주 “관객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이에요”

2016.11.09
서영주는 모두에게 각기 다른 얼굴로 기억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금세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베르테르([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로, 자신이 기사임을 철썩같이 믿는 노인을 위해 기꺼이 그 연극에 동참해주는 여관 주인([맨 오브 라만차])으로, 입양한 딸을 훔쳐보며 음흉한 상상을 하는 터핀 판사([스위니 토드])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는 많다. 그러나 중후한 목소리와 다이내믹한 표정, 걸음걸이와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에서 캐릭터를 찾아내려는 집요함이 만든 그의 캐릭터들은 짧은 순간에도 존재감을 뚜렷하게 한다. 그것이 서영주를 30년 가까이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이유다.


오래간만에 밝은 작품을 하시게 됐네요.
서영주
: 요 근래 한 2~3년간 악역이거나 좀 어둡거나 그런 걸 많이 했어요. 목소리 때문인가? [오! 캐롤]은 대본을 봤는데 약간 [그리스]나 [올슉업] 같은 느낌이라 관객들이 유쾌하고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파라다이스 리조트 쇼무대에서 진행하는 MC 허비 역을 맡았는데 20년 가까이 한 여자를 마음에 품다가 마지막에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인물이에요.

요즘에는 [그리스]같이 신나는 뮤지컬이 드문 것 같아요.
서영주
: 후배들한테는 욕먹을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노래, 춤, 연기가 어느 정도 밸런스도 맞고 트레이닝도 많이 받았는데 요즘은 그런 작품도, 그런 배우도 드문 것 같아서 아쉬운 면이 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요. 닐 세다카라고 하면 사실 잘 모르는데, 노래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알걸요. 신나는 곡들이라 안무도 많고. [그리스]는 케니키로 서른아홉까지 했고, [올슉업] 때도 춤추고 나면 힘들어서 소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하면서 재밌었어요. 작품에 나오는 델이라는 애는 바람둥이에 허세도 있어서 [그리스]의 대니 같거든요. (남)경주 형이 5년만 젊었으면 델 하고 싶다고 하던데 저도 한 5년만 젊었으면 싶더라고요.

코미디와 멜로가 섞인 작품이라 들었는데 둘 중 어떤 게 더 자신 있으세요?
서영주
: 멜로죠, 저야. (웃음) ‘내 전공은 멜로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주변 배우나 스태프들이 인정을 안 해줘요. 서영주 하면 웃기는 사람으로 아니까. [둘리]에서 고길동을 맡으면서 코미디 연기를 처음 했고, 아마도 정점을 찍은 건 2012년에 했던 [맨 오브 라만차] 여관 주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사실 1막에서는 코미디로 관객들을 많이 풀어주고 2막에서 속마음을 얘기하는 방식이라 코미디와 멜로 둘 다 경중을 따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제게는 베르테르의 잔상이 짙게 남아 있는데요. (웃음)
서영주
: 2000년에 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때가 제일 좋았고, 그 작품에는 애정도 많아요. [명성황후]의 고종도 솔직히 멜로였고, [몽유도원도]나 더 위로 올라가면 최정원 씨랑 했던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도 멜로였거든요. [맨 오브 라만차] 이전에는 약간 서정적인 부분이 많은 배우였는데, [맨 오브 라만차] 이후에는 개그적인 부분이 많은 배우로 관객들에게 기억되죠. [스위니 토드]의 터핀 판사도 그렇고 이 작품의 허비도 그렇고, 나와 많이 다른 캐릭터를 만났을 때는 “도전!”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거든요. 다양한 역할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여러 역할을 다 소화할 수 있게 돼서 배우로서는 플러스가 많이 됐겠지만, 여전히 제일 잘하고 싶은 건 멜로예요.

멜로는 젊은 배우들에게 집중되는 게 사실이잖아요.
서영주
: [오! 캐롤]에는 나이대별로 세 커플이 나와요. 우리 뮤지컬 관객들은 2030대 여성이 많은데 물론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관객도 같이 나이가 들고 이제는 100세 시대니까 그들이 보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브로드웨이에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공연됐었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했던 역할은 꼭 해보고 싶어요.

앞서 이번 작품도 도전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이 새롭게 느껴지나요?
서영주
: MC라서 스탠딩코미디를 해야 되거든요. 막상 해보니까 심지어 막 떨리기까지 하더라니까. 보통 공연 마지막 날 무대인사를 하잖아요. [스위니 토드] 막공 때 시험 삼아서 스탠딩 개그를 해봤는데 반은 웃고 반은 어색해하시더라고요.

코믹한 캐릭터를 맡으신 경험이 많아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서영주
: [로빈훗]에서도 주접을 떨었는데, 모든 캐릭터가 무거워서 저까지 무게를 잡아버리면 정~말 재미없는 작품이 될 것 같아서였거든요. 반면에 [스팸어랏]은 다 상태가 안 좋은 캐릭터들이었으니까 (웃음) 나름 중심을 잡아야 했고. 기존에 했던 코미디 연기들이 대본에서 호흡을 찾아내고 상대 배우와의 액션-리액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건 오로지 나 혼자 관객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코미디니까 더 쉽지 않더라고요. 다 내려놓고 해야 돼요. 배우로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관객을 지루하게 하면 안 된다’거든요. 단순히 웃기고 안 웃기고가 아니라 진지한 연기를 해도 그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과 빠져서 보는 건 달라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이에요.

대신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참여해서 ‘선배’라는 부담감은 덜한 편이겠어요.
서영주
: 다들 저보고 1세대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2에 가까운 1.5? 1.8 정도? (웃음) 항상 어느 작품에 가든 제가 제일 위인 경우가 많아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 아닌 부담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고맙게도 위에서 세 번째에요. 연출님이나 안무선생님도 저 20대 때부터 같이 작업해온 분들이라 익숙하고. 요즘 우리나라 뮤지컬배우들의 층이 꽤 두꺼워졌어요. 예전에는 제 나이쯤 되면 거의 안 계시거나 할아버지 대우를 받았죠. 요즘에는 나이보다도 젊어 보이고 젊게 살기도 해서 그런 갭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배우들의 연령대가 다양해진 것은 고무적이지만, 그것에 비해 캐릭터의 나이는 점점 낮아지는 게 많이 아쉬운 부분이에요.
서영주
: 사실 좀 답답해요. 그래서 제가 제작자들에게 하는 말이, 회차를 줄여도 되니까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거거든요. 인생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해야 더 좋은 배역들이 있잖아요. [스위니 토드], [맨 오브 라만차], [닥터 지바고] 같은 것들. 특히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30대 후반, 40대가 해야죠. 아무래도 내가 배우니까 더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일 텐데, 또 시장 상황이나 제작자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니까…. [닥터 지바고] 하자고 했을 때도 제작자한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돈키호테나 지바고는 내 것 같다고. 아직 스위니 토드는 말을 못 했지만. (웃음)

[맨 오브 라만차] 제안 들어왔을 때 많이 당혹스러우셨겠어요.
서영주
: [닥터 지바고]를 하고 있을 때 제작사에서 [맨 오브 라만차]를 같이 하자고 했단 말이에요. 돈키호테인 줄 알았죠. 그런데 도지사/여관 주인을 하라는 거야.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도지사가 뭔지도 몰랐어요. 예전 영상을 봤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보다 졸았어요. 솔직히 말은 안 했지만 배우로서 자괴감도 들었어요. 나한테 왜 이걸 하자고 했지, 내가 이제 이런 역할을 해야 되는구나. 다행히 관객분들이 너무 좋아해주셔서 위안이 됐지만, 2013년 [맨 오브 라만차] 때는 돈키호테 커버를 시켜서 흔쾌히 한다고 하고 커버 연습까지 다 했어요. 다음 시즌에 또 도지사 하라고 하면 안 하려고요.

올 초에는 [신과 함께 가라]로 오래간만에 소극장 창작뮤지컬도 하셨죠.
서영주
: (이)석준이가 제작을 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잘 알던 친구고 후배들에게 호통 아닌 호통을 하는 캐릭터로 되어 있어서, “이게 뭐니 너 이렇게 하면 안돼!” 이랬거든요. (웃음) 공연 끝나고 나니까 미안하고 후회되고 그래요. 큰 극장, 라이센스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 공연하다가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하니까 갑자기 제가 20대 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이 통으로 처음 들어왔던 작품이 2002년에 했던 [오페라의 유령]이었는데, 배우가 무대에 등장할 때 소대에서 커튼 잡아주는 크루까지 큐시트에 명시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명성황후] 할 때 고종 옷 입고 세트 들고 의상 나르고 망치질 하고 그랬거든요. 예전에는 다 이렇게 했었는데 내가 조금 배가 불러져서 너무 편한 것만 추구했구나라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했어요.

30년 가까이 무대에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영주
: 그런 질문 항상 받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좀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배우는 선택되어지는 입장이고, 선택되어지는 기준은 모두 다르잖아요. 각자 다른 기준이더라도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걸 내가 갖고 있다면 선택할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실력도 중요하지만 생활 태도도 무시 못 해요. 물론 요즘은 사실 티켓 파워가 중요해져서 쇼비즈니스 바닥에 있으려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되지만.

‘뮤지컬은 쇼’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서영주
: 여긴 쇼비즈니스예요.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봐도 쇼비즈니스잖아요. 대신 작품의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특히 [오! 캐롤]은 제목에서도 왠지 크리스마스나 록앤롤, 팝 이런 것들이 떠오르잖아요. 대단한 감동을 받겠다, 라는 마음보다는 2시간 동안 마음의 짐 내려놓고 그냥 재밌게 즐겁게 보시면 돼요. 메시지는 뭘까, 이런 거 아니에요. (웃음) 연말연시 좋은 사람과 재밌게 잘 봤다, 그거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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