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으로 끝내는 예능 자막 만능단어 7

2016.11.18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평균 3초에 한 번씩 새로운 자막이 등장하는 시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텍스트에 제작진은 물론 시청자도 피로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다수의 최신 예능 프로그램들을 분석해 사례와 용법을 정리한 다음의 일곱 단어만 알고 있으면 자막을 만들기도, 자막을 이해하기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아무 때나 아무 데나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마법의 단어들!
 

[걸크러시]
적용 1. 요즘 잘나가는 여자를 소개할 때 
적용 2. 오늘의 여자 게스트가 나왔을 때


‘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 또는 그런 현상’이라는 사전적 의미, ‘걸크러시’라는 단어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은 예능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MBC [무한도전]에서 하하는 “팜므파탈 같은 거 아니냐”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샀지만, KBS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호동 잡는 걸크러시 시영”이라고 쓴 걸 보면 그냥 ‘어떤… 여자’를 칭하는 말이다. MBC [듀엣 가요제]는 마마무의 솔라를 소개하며 “솔라 등장에 요동치는 남심”에 뒤이어 “걸크러시 일으키는 대세 아이돌”이라고 설명했다. ‘걸크러시 매력’, ‘걸크러시 유발자’, ‘깨져버린 걸크러시’ 등 형용사인지 명사인지도 상관없고, 누가 누구에 대해 느끼는 어떤 감정인지도 알 바 아니다. ‘숙크러시’라는 파생어를 획득한 김숙에 이어 ‘걸크러시’의 대명사가 된 김연경이 출연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팩 하는 김연경에 대해 “걸크러시 연경의 귀여운 반전 매력”을 포함, ‘걸크러시’가 들어간 자막만 10회 이상 등장했다. 

[센 언니]
적용 1. ‘걸크러시’와 바꿔 쓸 말이 필요할 때 
적용 2. 만만하지 않은 여자 연예인이 나왔을 때  


라미란, 서인영, 화요비, 가인, 유빈, 길건, 박나래, 장도연, 치타, 제시, 솔비, 미나, 채연, 이지혜, 서인영, 채리나, 유리, 백지영, 솔라, 예지. 예능에서 ‘센 언니’로 불리는 데는 복잡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래퍼이거나,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리거나, 태닝을 했거나, 섹시 콘셉트로 활동했거나, 30세 이상이거나, 걸 그룹 멤버가 아니거나, 데뷔 10년 이상이 지났거나, 사투리 억양이 강하거나, 목소리가 크거나,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웃기거나, 19금 농담을 태연히 던지거나, 이 가운데 한두 가지만 해당되면 ‘센 언니’ 인증 자막이 붙는다. 즉 긴장하거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애교와 거리가 멀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여성 연예인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활용도 높은 자막인 것이다. 

[천생 여자]
적용 1. ‘걸크러시’의 반전 매력을 보여줄 때 
적용 2. ‘센 언니’의 반전 매력을 보여줄 때


‘걸크러시’나 ‘센 언니’는 필연적으로 ‘천생 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예능의 법칙이다.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바지를 주로 입으며 농구를 좋아하는 f(x)의 엠버는 이처럼 끈질긴 ‘천생 여자 만들기’의 최대 피해자로, 바느질만 잘해도 ‘천생 여자’, 친구에 대한 배려심만 보여도 ‘천생 여자’, 집에서 설거지만 해도 ‘천생 여자’라 불려왔다. 방을 잘 정리해 꾸며놓았거나, 가족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거나, 연애 사실이 공개되는 바람에 조심스레 연인에 대해 언급하는 등 여성이 사적인 공간을 공개하고 개인적인 영역에 대해 드러내는 순간 ‘천생 여자’라는 자막은 자동반사적으로 붙곤 하는데, 특히 그 전까지 강하고 뛰어나고 냉철한 면모를 보였던 여성일수록 호들갑스럽게 ‘알고 보면 천생 여자’로 포장할 수 있다. ‘센 언니’와 ‘걸크러시’ 외에도 ‘천생 여자’를 붙이기 쉬운 대상은 유아다. SBS [오! 마이 베이비]가 방송 당시 세 살이었던 슈의 두 딸이 매니큐어를 바르며 논 다음 뚜껑을 덮어 정리해놓는 모습에 “우리 라둥이 천생 여자랍니다”라고 기특해한 것처럼.

[브로맨스]
적용 1. 친한 남자 두 명이 같이 있을 때 
적용 2. 남자 두 명이 같이 있을 때


‘걸크러시’와 마찬가지로, ‘남성 간의 애틋한 감정이나 관계를 뜻하는, 브라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합친 신조어’라는 본래 의미는 그냥 잊어버리자. 지금 한국 예능에서 ‘브로맨스’는 친구, 콤비, 사제, 지인 등 두 남자 간의 이런저런 관계와 상황을 모두 대체한다. 오래 알고 지냈으면 당연히 브로맨스, 초면이라 어색하면 설레는 브로맨스, 우호적으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 둘만의 브로맨스, 같은 작품에 출연하면 공식 브로맨스 커플, 스킨십이라도 하면 꽃잎이 날리는 효과 및 감미로운 BGM과 함께 브로맨스다. tvN [삼시세끼 – 어촌 편]에서 끈끈한 우애를 보여주었던 차승원과 유해진은 그렇다 쳐도, 조세호와 남창희, 이경규와 강호동, 송대관과 태진아까지 시도 때도 없이 ‘브로맨스’라 칭하는 한국에서 토니가 함께 사는 김재덕과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도 때도 없는 브로맨스?”라며 끼어드는 자막 정도는 애교인 것이다.

[상남자]
적용 1. 남자가 운동을 할 때 
적용 2. 남자가 혼자 있을 때 


‘센 언니’가 그렇듯 예능에서 ‘상남자’ 자막 인증을 받는 데는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또렷한 복근을 공개하거나, 팔 근육을 노출하거나, 근력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파워풀한 댄스를 추거나, 공구로 뭔가를 만들거나, 무거운 짐을 들거나,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서 진지한 얼굴로 고백 대사를 뱉거나, 가상 연애 파트너에게 질투심 어린 발언을 하면 ‘상남자’로 불리고, 그에 따른 옵션은 ‘여심저격수’다. 이 중 어떤 상황에도 해당되지 않고 아무 맥락 없이 단지 싱글 남성이라는 이유로 붙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남자’라는 자막이 의아할 수 있지만, 심지어 ‘상남자’는 꼭 남자일 필요도 없다는 면에서 진정한 만능단어라고 할 수 있다. 채널 A [잘 살아보세]에서는 기운 세고 일 잘 하고 밥 잘 먹는 탈북 여성 량진희를 가리켜 ‘상남자’와 ‘머슴녀’라는 자막을 나란히 사용하기도 했다. 

[아재 입맛]
적용 1. 유아가 한식을 잘 먹을 때
적용 2. 25세 이하의 여성이 한식을 잘 먹을 때 


예능에서 ‘아재 파탈’, ‘아재 매력’, ‘아재 브로’ 등 온갖 좋거나 혹은 얼토당토않은 것들에까지 ‘아재 OO’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 1, 2년 사이의 급격한 흐름이다. 그중에서도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는 이동국의 아들 대박이는 만 2세도 되지 않은 시점부터 ‘아재 대박’으로 불려왔는데, 홍삼액, 청국장, 장어꼬리, 추어탕을 먹을 때마다 ‘아재 입맛’이라는 자막이 끝없이 등장한다. ‘먹방’ 프로그램에 출연한 걸 그룹 멤버들을 비롯해 한식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을 신기해하는 동시에 기특해하는 프레임 역시 ‘아재 입맛’이다. tvN [수요미식회]에서 MC 전현무가 스물한 살이라는 이하이더러 “정말 초딩 입맛이겠네요”, 그런데 생고기를 좋아한다니까 “어머님 입맛이네요”, 그중에서도 육사시미를 좋아한다니까 “아재 입맛이네요”라고 차례로 말을 바꾼 것은 상징적이다. 젊은 여성은 전통적인 한식을 좋아해도 아재, 걸걸한 목소리를 내도 아재, 호탕하게 웃어도 아재, 다리를 벌리고 앉아도 ‘아재 OO’가 되는데, 이때 어우러지기 좋은 자막은 ‘의외의’나 ‘반전 매력’이다. 

[장난장난]
적용 1. 잘못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을 때 
적용 2. 맞는 말이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을 때 


리얼 버라이어티 전성시대 이후, ‘미안미안’, ‘지긋지긋’, ‘오글오글’ 등 출연자의 속내와 기분을 규정하고 평가까지 하는 등 전지적 제작진 시점을 담아 쏟아지는 자막들은 시청자가 상황을 스스로 해석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를 향해 “남자 못 만날 것 같더니” 같은 무례한 말을 했을 때, “안 웃겨” 등 면박을 줬을 때, 때리려는 포즈를 취했을 때, 자신보다 어린 출연자에게 강압적인 언행을 보였을 때, 인신공격성 농담을 던졌을 때 등 갈등 및 논란이 발생하려는 여지가 보이자마자 잽싸게 차단해버리는 궁극의 기술이 바로 ‘장난장난’ 혹은 ‘농담농담’이다. 반대로 상대의 잘못이나 문제점을 대충 넘기지 않고 정색하거나 지적하는 출연자의 진심이 담긴 멘트를 흐릿하게 만들어 웃어넘기도록 권장하는 것 역시 ‘장난장난’과 ‘농담농담’이니, 이것이야말로 한국 예능의 ‘리얼’을 필터링하는 마법의 자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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