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터리열사다

2016.11.22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패닉에 빠진 아는 미국인에게 말했었다. “오늘이 멸망의 날인 거 같지? 아니야, 이제 시작이야.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질 거야. 그러니까 초반 러시 하지 마. 이런 시국 9년 차로서 말하는데 제일 중요한 건 네 에너지 보존이야. 제발, 배터리를 아껴.”

우리와 달리 시스템이란 게 존재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이 오지랖인 것은 알지만, 대통령 한 사람이 온 나라를, 개개인의 삶을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망칠 수 있는지 선행 학습한 사람으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런 시국’을 살아간다는 건 분노의 디폴트값이 높다는 의미니까. 기쁨, 슬픔, 즐거움 등이 공존하는 컨트롤타워 내에서 분노가 실세 1위랄까 감정의 몸통이랄까?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보고 치킨을 뜯는 순간은 잠깐. 뉴스 한 꼭지에 이내 꼭지가 돈다. 그리고 꼭지 도는 뉴스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SNS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이게 벌써 9년이다.

열렬히 좋아하는 것보다 열렬히 미워하는 게 배터리 소모가 큰 이유는 리워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정권 하에서 거듭 분노하는 동안 우리는 우주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블랙홀에 기운을 빨렸다. 여자, 소수자, 약자 혐오를 에너지원 삼아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극혐’으로 맞서다 보니 고정분노비용은 늘어갈 뿐이다. 경기침체가 길어지고 가난해질수록 고정생활비용 비중이 높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유니클로에선 로고가 박힌 방풍 뽁뽁이를 사은품으로 주고 있다. 10년 넘게 광고마케팅을 해온 사람으로서 감탄해버렸다. 2016년 지금 이곳을 어떤 사회학자보다 날렵하게 캐치한 프로모션 아닌가? 유니클로 구매자 중엔 월세, 휴대폰요금, 교통비, 식비, 대출이자 같은 고정생활비용이 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입은 한정돼 있고 고정생활비용은 말 그대로 줄일 수 없는 비용이니 줄여야 할 건 난방비다. 칼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몇 겹의 히트텍에 파카까지 껴입고, 난방텐트 안에서 코 시린 잠을 청한다. 김부선의 뒤를 이어 우리도 난방열사가 되어간다. 경제적 파산을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정신적 파산을 피하려면 애티튜드에도 뽁뽁이를 붙여야 한다. 겨울은 끝나기라도 하지, 이 시국은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이를테면 여성혐오, 젠더이슈 등에 관해 잠재적 아군인 나부터 설득해보라는 사람은 애써 설득하지 않는다. 이들이야말로 가까운 적이며 날로 먹으려는 에너지 뱀파이어들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지 않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강남아줌마, 미용주사 맞는 여자 조롱하며 정치풍자라고 우기는 코미디프로나 그런 프로에서 주워들은 낡은 농담을 던지며 리액션을 요구하는 회사 상사 등에겐 무관심, 무표정이 답이다. 감정노동을 원하면 돈을 더 달라고 하자. 그리고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본인의 분야가 아니거나 말거나 심판의 한마디를 남기려는 어떤 ‘선생님’들,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듯 유리천장을 부정하며 제 입으로 제 무덤 파는 분들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 ‘닥침력’이다. 탈유머강박과 함께 모두의 에너지 절약에 도움이 된다. 요즘 언론사 SNS 계정들도 무리하곤 하는데 그러지 말자. 성공한 드립은 이미 타임라인에 넘쳐난다. 각자 잘하는 걸 제대로 하면 된다.

이 외에도 방법은 다양하다. 권력과 이권을 가진 이들이 저리도 필사적으로 자기 자리를 사수하려 드는데 나 또한 필사적으로 배터리를 사수할 수밖에 없다. 계속되는 집회도, 후원도, 농담도, 존엄도 이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차피 내겐 착취할 보조배터리 같은 건 없으므로. 내가 나의 영토이자 조국이므로.

김진아
광고업자이자 자영업자.




목록

SPECIAL

image 나는 실내인이다

MAGAZINE

  • imageVol.169
  • imageVol.168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