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① 우리가 돈만 없냐, 미래도 없지

2016.11.22
앞으로 291달. 나중에 국민연금 혜택을 받기 위해 연금을 납부해야 하는 날짜다. 지금까지 101달, 햇수로 환산하면 8년하고도 약 5달 동안 월급에서 꼬박꼬박 4.5%를 떼고 근무하던 사업장에서 나머지 4.5%씩 내주며 연금을 모았지만, 미래에 월 백만 원 정도의 연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291달 더 일하고 연금을 납부해야 한다. 주간지 기자로서 매주 2꼭지의 기사를 쓰고 있으니 지금 같은 페이스라면 2,500개의 기사를 더 써야 하고, 기획회의를 1,250번 더 해야 하며, 킬 될 것까지 고려하면 6,000개 정도의 아이템을 더 내야 한다. 징징대선 안 될 것이다. 동종 업계 중 하나인 속보 위주의 연예 매체 기자는 하루 최소 15개 정도의 속보를 쓴다. 그들 기준으로 환산하면 주말 근무가 없다고 가정해도 98,200개 정도의 기사를 써야 한다. 업종마다 써야 하는 기획서, 영업을 위해 마시는 술잔, 튀겨야 하는 치킨의 숫자로 제각각 환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징징대선 안 될 것이다. 이것조차 회사가 망하지 않거나, 잘리지 않거나, 경력 단절 없이 이직하는 것을 전제한 희망적인 미래니까.

하지만 나 개인의 고용안정성이나 노동과는 별개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또 생겼다. 국민연금 자체다. 최근 KBS는 2015년 삼성 이재용 일가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 발생한 손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과 삼성의 유착 덕분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해당 합병에서 삼성물산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 측은 자문기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성물산의 주식 가치를 제일모직의 3분의 1로 계산해 합병하는 데 동의하며 결과적으로 6,000억 원 정도의 평가 손실을 입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와 복지부장관의 압박이 있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국민연금이 기금을 운용하다가 손해를 보는 일은 전에도 있었다. 3년 동안 대우조선해양에 투자해 2천4백억가량 손해를 본 사례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땐 잘못된 판단은 했을지언정 국민연금 자산을 실질적으로 다른 이의 배를 불리기 위해 사용한 건 아니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국가가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돈이 누군가의 사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다.

많은 이들이 이게 나라냐, 혹은 난민과 다를 게 뭐냐, 라고 한탄하는 것을 단순한 비유로만 볼 수 없다. 6,000억 원이나 되는 ‘우리’의 돈이 실질적으로 한 재벌 일가를 위해 사용됐으며 행정부의 공정성에 구멍이 났다는 명백하고 중차대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원론적으로 적절한 처벌과 인사를 통해 공정성은 회복될 수 있다. 빠져나간 돈도 앞으로의 노력으로 메울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러한 희망적 사고에는 지금의 노력에 상응하게 보상받는 미래가 전제되어 있다. 선거 때마다 투표장에 나가고, 내가 겪은 부당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고, 매달 꼬박꼬박 연금을 내는 건, 이 행동들이 멀거나 가까운 미래에 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암묵적 전제로 지탱된다. 그 전제가 붕괴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실천을 규정하는 삶의 방향성 역시 무너진다. 이번 국민연금 문제에서 국가란 게 한 짓이 그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매달 돈을 내면 언젠가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시장주의적인 희망을 배신한 게 아니라, 그 희망을 이용해 사욕을 채웠다. 여기서 우리를 지탱해주던 희망적 사고는 불확실한 것이 아닌 믿으면 안 되는 것이 된다. 난민의 수사학은 정당하다. 미래를 그리며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게 불가능한 곳은 나라가 아니다.

똑같이 나라 없는 사람의 기분을 느낄 때조차 그 고통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이 분배된다. 내가 계속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할 때, 일용직 노동자는 내일의 일당을 걱정하고, 기초생활비 수급 대상자는 내일의 쌀을 걱정한다. 물리적인 복지와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재벌보다는 일반 회사원들에게, 일반 회사원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보다는 물리적으로 노동 자체가 어려운 장애 빈민들에게 필요하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정의의 제2원칙으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그것이 사회 최고 약자인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번 국민연금 사태에서 국가는 재벌의 이득을 도우며 불평등을 심화했지만, 최소 수혜자들은 복지기금 혜택을 받기 더 어려워졌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극빈층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생계 급여 수급자를 올해 135만 명에서 내년 127만 명으로 줄인다. 내년이 되면 당장 국가가 밀어낸 8만 명의 난민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나라 없는 사람의 심정이라 해도 무기력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건 그래서다. 국가는 괘씸하지만 동료 시민의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세월호 사건 이후 각자도생 담론에서의 국가가 희망을 주지 않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국가였다면, 이번에 드러난 국가는 희망을 담보로 국민을 착취하는 교활한 국가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노오력’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상을 제시하고, 바로 그 개개인의 ‘노오력’을 뽑아 먹는다. 나의 노력이 적립되지 않는 나라, 나의 노력이 미래를 열어주지 못하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웃을 일이라고는 대통령이 병원에서 VIP 진료를 받으며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썼다는 사실에 실소하는 것뿐이다. 과연 여기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희망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게 가능할까.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확보된 건 지금 이곳일 뿐이다. 연금은 보장되지 않지만 어쨌든 오늘도 출근하고 마감하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며 정부를 비판하는 바로 지금 이곳. 이 토대는 결코 단단하거나 넓지 않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곳에 발을 디디고 희망의 근거를 찾을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저기 저 미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청와대에서도 저렇게 잘 버티는 이보다는 더 오래 덜 비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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