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욱 “저는 확실해요. 애매한 게 제일 싫어요”

2016.11.23
“‘나를 잘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작년 여름, 연극 [올드위키드송] 초연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김세동은 이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다. 50대 보컬코치와 20대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통해 환희와 슬픔의 결합을 확인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만든 기준과 영역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던 스티븐은 허허실실한 마슈칸의 농담과 번뜩이는 말들을 통해 자신의 벽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고, 마슈칸 역시 스티븐의 성장을 도우며 자신의 상처도 치유한다. 이현욱은 [올드위키드송]으로 두 번째 연극을 하게 됐다. 그는 자신과 너무 닮아서 편하고, 너무 닮아서 부끄러웠던 스티븐을 만나 본인 역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연극으로 [올드위키드송]을 하게 됐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이현욱
: 초연 때 스티븐 역을 맡았던 (박)정복이 형이 “나중에 꼭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딱 일주일 후에 대본이 들어왔어요. 제가 했어야 했던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스티븐과는 어떤 면에서슷해요? “이현욱이 곧 스티븐”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잖아요.
이현욱
: 사실은 ‘스티븐 같다’는 말들이 이제는 부담스럽더라고요. 분명 모두에게 그런 면들이 있을 텐데 유난히 나한테만 그렇게 돌아오는 것 같아서. (웃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위해를 직접적으로 당해서가 아니라 말에 상처를 받잖아요. 내 마음과 다르게 나가는 표현들 때문에 오해를 산 적도 있고, 부끄러워서 무덤덤하게 뱉었던 말들로 상대를 서운하게 한 적도 있어요. 본의 아니게 내가 했던 말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대본을 봤는데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스티븐의 행동이나 감정이 어떤 건지 제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표현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오해를 많이 받는 편인가요?
이현욱
: 제가 눈치가 굉장히 빨라요. 상대방이 나한테 호의적인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바로 느껴요. 그래서 부끄러우면 반어적으로 말이 나올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누군가 저를 칭찬해요. 그러면 “네, 감사합니다”라고 바로 흡수를 못 하고 오히려 자학적으로 빠져버리거든요. 상대는 나를 배려해준 것이었는데 나는 그 배려를 무시한 게 될 수도 있잖아요. 또 오해했겠구나 싶으면서도 부끄러워서 스스로 수습 못 할 때가 많았어요.

눈치를 많이 보게 된 건 어떤 이유에서에요?
이현욱
: 집이 경기도 이천인데 안양예고, 한국종합예술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중학교 이후로는 쭉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했어요. 열여섯 마지막에 집을 나왔으니까 딱 인생의 절반을 밖에서 혼자 지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남에게 피해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눈치를 많이 보게 된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표정, 행동, 뉘앙스 같은 걸로 상대의 상태를 알 수가 있잖아요. 그 데이터를 벗어나면 바로 감지가 되는 거죠. 그렇다고 “지금 기분 나쁜 거예요?”라고 물어보진 않지만. 쫌생이 같으니까. (웃음)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서면 굳이 있지 않아도 될 자리는 피하고. 그래서 웬만하면 말을 아끼려고 해요.

고등학생 때 혼자 지냈으면 많이 외로웠겠네요.
이현욱
: 사춘기였으니 감성적으로도 예민한 시기잖아요. 게다가 안양예고는 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이니까 그 친구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위축된 것도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고, 연기한답시고 올라왔는데 끼 있는 친구들도 많고. 이천이 지금은 시가 됐지만 그때는 군이었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자신감을 잃게 하는 것들이었죠.

어떻게 버텼어요?
이현욱
: 아무것도 없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가진 게 없어서. 나는 여기서 더 내려갈 데가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드니까 위축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오래전부터 연기를 배운 친구들도, 경제적인 서포팅이 좋았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들의 능력이니까 존중해줘야 하는 거예요. 내가 저런 걸 부러워하고 안 좋게 봐야 할 이유가 있나, 난 여기서부터 가면 되지 싶었어요. 자기 최면을 많이 걸었죠.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으면 그 뒤부터는 밀고 나가는 성격인가 봐요. 이현욱의 스티븐이 이성적으로 느껴지던 것도 이런 성격이 영향을 미친 거 아닐까 싶네요.
이현욱
: 저는 확실해요. 애매한 게 제일 싫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적인 스티븐을 원하는 분들도 계신데, 제가 대본에서 본 스티븐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감정적인 인물이었다면 마슈칸 선생님의 헛소리를 못 참고 나가버려야죠. 그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건 이 사람을 무시하고 싶지 않은 거고, 짜증이 나도 이 사람에게서 얻을 게 있어서거든요. 그게 계산적이라 하더라도. 마슈칸은 그런 스티븐에 대해 자신이 느낀 점을 가감 없이 얘기하고, 저는 또 그런 말을 듣는 걸 좋아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정확하게 누군가가 얘기해줬을 때의 데미지가 엄청나지만, 그걸 튕겨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여서 완전 터닝포인트가 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후자예요. 그래서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저도 얘기를 많이 해주거든요.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는 나만의 룰은 있지만, 직설적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요.

직접적인 말들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다수가 위로를 받고 싶어 하잖아요?
이현욱
: 친구들 고민도 많이 들어주는 편인데, 이런저런 얘기 해주다 보면 “어쨌건 들어줘서 고맙다” (웃음) 하고 가잖아요. 본인들한테 정답이 다 있어요. 그리고 사실 저한테는 달콤한 말이 정말 독이에요. 저는 굉장히 거만해질 수 있고 게을러질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달콤한 말은 나에게는 필요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쳐내려고 해요.

거만해질 수 있는 성격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건가요?
이현욱
: 하나에 빠지면 끝을 봐야 되는 성격이라, 달콤함도 빠지게 된다면 못 헤어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살면서 저도 때로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만족이 생겨서 자만하게 될 수도 있고, 오만함이 나도 모르게 나올 수 있거든요. 제 외모에 건방지면 정~말 재수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외모가 어때서요.
이현욱
: 눈매가 이래서 굉장히 냉소적이고 냉철하고 차갑고 반사회적인 (웃음) 느낌이 있잖아요. 스티븐 같은 캐릭터를 한다는 건 나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거거든요. 연기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정확히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네요.
이현욱
: 모든 배우가 매너리즘을 경계하잖아요. 저는 거기에 나르시즘도 경계하는 편이에요. 저는 어쨌건 관객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이 객관적인 시선을 갖지 않고 주관적으로 자신에게 심취해버리면, 그건 자칫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어요. 자신의 주관과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표현하는 건 좋지만, 이걸 설득시키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빠지는 건 위험하죠.

누군가의 앞에 나서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은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이 제1순위라고 생각했는데요.
이현욱
: 모두가 나르시즘을 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곧 자존감이기도 하고요. 그건 맞는데 강요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충분히 교류할 수 있는 느낌이 필요해요. 가끔 연기하는 친구들한테 연기 왜 하냐고 물어보면, 다른 인물로 사는 게 좋고 조명기 아래서 조명 받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그래요.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돈도 인기도 필요 없고, 그냥 무대에 서는 게 좋다. 그럼 왜 대중 앞에 나오려고 하는지, 왜 회사를 구하고, 왜 상업극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연기는 상대 배우, 스태프는 물론이고 연극의 경우에는 관객과의 호흡도 중요한데 왜 혼자만 생각하는 연기를 하는지. 전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싶어요.

그럼 왜 연기해요?
이현욱
: 정말로 제가 제일 흥미 있어 하는 일이라서 그래요. 여태까지 해왔던 일 중에 가장 재밌는 일이고,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도 이게 가장 우선순위인 것 같아요. 사람들한테 인정도 받고 싶고요. 연극을 하다 보면 내 감정이 안 올라오거나 관객의 집중도가 약할 때 잠깐 가만히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관객들이 앞으로 다가오는 게 보이거든요. 그런 걸 약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종종 내가 가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는 순간에는 그게 웃기기도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요.

이번 작품에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싶은 게 있다면 어떤 거예요?
이현욱
: 가장 힘든 건 연출님이겠지만, 연기하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천 가지를 찾았다고 해서 그걸 다 가지고 올라갈 순 없으니까 계속 거르고 걸러서 베스트를 만들어내야 해요. 선택의 순간이 반복되니까 가끔은 지치기도 하고, 공연 때보다 연습 때 감정적인 에너지를 더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감정이라는 게 늘 똑같은 건 아니기도 하니까요.
이현욱
: 그거 정말 위험하거든요. 어제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웃었으니까 웃겠지, 하고 했는데 반응 없을 때 무너지는 배우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 순간을 무마하려고 뒤에서 에너지를 과하게 쓰느라 작품이 점점 산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저는 모드를 최대한 빨리 전환하려고 하는 편인데, 사실은 관객들이 더 빨리 알아요. 그분들은 처음부터 계속 섬세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배우의 감정 변화를 느끼거든요.

순발력이 좋은 편인가요?
이현욱
: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이번 작품은 2인극인 데다 선생님들 대사가 워낙 많아서 가끔 헷갈려하시거든요. 이걸 처리해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들 대사까지 다 외우고 있어요. 어떻게든 흐름을 이어가야 하니까 얘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해요. 저도 어렸을 때는 상대방 대사 끝날 때만 기다렸다가 내 대사 치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말을 들어야 해요. 사실 표정이 많지 않아서 티가 잘 안 나는 것도 있지만.

프로연극무대 경험이 많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순발력이 좋은 건 줄 알았어요.
이현욱
: 대본 많이 보면 다 가능해요. 상황을 알고 인물의 정서를 알면 여기서 얘가 당황했을 때 무슨 말을 했을까가 나올 수 있어요. 대본 안에 정답이 다 나와 있다는 말씀을 선생님들도 많이 하시거든요. 옛날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뭐가 나와 있어, 어떻게 하라고, 대사만 써 있는데! (웃음) 계속 읽다 보면 얘가 어떤 생각을 했을 때 공감하게 되는 시점이 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상황이 작위적이거나 상투적인 대사가 있으면 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고 연출님이랑 상의도 해볼 수 있게 되고. 아직도 대본을 보는데 볼 때마다 다른 게 자꾸 떠올라서 무대에서 티 안 나게 시도도 많이 해요. 그러지 않으면 무대에 올라올 이유가 없잖아요. 특히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져서 준비 많이 안 하고 올라가면 큰일 나요.

종종 과한 해석이라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이현욱
: 정답은 없는 거고 해석하기 나름이거든요. 오히려 저는 더 흥미로워요. 사람의 관점이라는 게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고, 내가 갇혀있었구나 싶기도 해서 저도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결국 자기가 세운 기준 안에서 적절하게 반영해가는 것이 중요하죠.

[올드위키드송]을 ‘인생극’이라고도 했는데,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이현욱
: 이 작품으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같이 사는 형이 공연을 봤는데 공연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제 캐릭터가 숨이 막혔다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랬던 아이가 후에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스킨십도 나누게 되거든요. 미생이 완생이 되는 것. 이번 작품은 저의 치부를 드러내는 느낌이기도 했는데, 연극에서도 두 인물이 자신들의 상처를 드러내고 가까워지는 것처럼 저도 그런 걸 드러내니까 나를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일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문제를 자각하고 변화하려고 시도하고, 덕분에 표정도 많아지고 밝아졌어요. 옛날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합리화를 하려 했다면 이제는 안 그러면 되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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