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예술과 중력가속도], 변치 못할 옛사랑

2016.11.25
과학기술창작문예라는 상이 있었다. 이 오래된 공모전이 한국 SF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수상자만 해도 김보영, 김창규 그리고 박성환 등 한국 SF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다. 더욱이 당선작 중 상당수가 데뷔작이었음을 생각하면, 고작 3회라는 짧은 횟수만 존재했던 공모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위업이다. 나는 이 공모전을 2005년 겨울,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과학동아]에 수록된 그해 당선작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2029년에 열린 SF공모전에 e메일 하나가 도착한다. 자신의 인생 마지막 작품을 보낸다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유작이 될 이 소설을 보낸 뒤 알약을 먹고 세상을 뜰 것이라고. 담당자는 SF를 사랑하는 동지로서 숙연함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투고작은 메일에 첨부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심란한 와중 애틋한 감상마저 곧 사라지고 만다. 죽겠다던 투고자에게서 새 메일이 왔기 때문이다. 재산을 처분해 집에서 쫓겨났는데 스마트 D가 모자라서 작품을 보내지 못했고 죽지도 못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스마트 D가 무엇이기에, 라는 의문은 지적재산권과 언어학 그리고 SF 공모전이라는 배경과 뒤섞여 사랑스러우면서도 냉혹하게 진행된다. 그렇다. 그 작품은 바로 배명훈의 데뷔작이자 제2회 과학기술창작문예 대상작, [스마트 D]였다. 이 작품을 읽은 나는 그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과학동아]를 구입했으며 몇 년 뒤 작가와의 대담에서 사인을 받은 뒤 책장 한켠에 고이 모셔놓았다. 나는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이 맞으니까 많이들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스마트 D]가 실린 첫 배명훈의 단편집, [예술과 중력가속도]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반가운 작품은 역시 [스마트 D]와 더불어 [조개를 읽어요]나 [예비군 로봇]처럼 웹진 [거울]과 월간지 [판타스틱]에서 발표된 단편들이다. 물론 고고학과 우주항공학을 뒤섞어 정지궤도에 위치한 유물을 이야기하는 [유물위성]이나 핵잠수함에서 근무하는 아이돌 팬의 티켓팅 분투기를 다룬 [티켓팅 & 타겟팅]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들이다. 배명훈의 작품이 언제나 그러했듯 거창하면서도 소박하고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소재들이 세밀한 논리와 학문적 시선을 무기로 삼아 사랑스러운 서사에 녹아든다. 그의 정교하고 아름답게 세공된 세계관은 그 자체로 즐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단편들이 더 반가운 이유는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블로그와 웹진이 부흥하던 일종의 황금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배명훈의 작품을 돌아보는 것은 연애 초기의 설렘과도 같다. ‘무엇으로 나를 또다시 놀라게 해줄까?’의 기대감과 ‘이번에는 반갑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의 우려가 뒤섞인 나날들 말이다. 이런 말은 무의미하고 또 무례라고도 생각하지만 나는 배명훈에게 실망한 적이 없고 이제는 우려가 불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래전에 받았던 연애편지를 다시 읽는 것과 같은 두근거림은 이 시기의 단편들을 읽을 때뿐이겠다.

2005년으로부터 10년하고도 1년이 지났다. 10년 전의 나에게 과학기술창작문예는 하나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감히 말해 나는 김보영 키드 1세대고 배명훈 키드 1세대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과학기술창작문예는 3회로 막을 내렸지만 이후로 SF 문학계에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등장했으며 팬덤은 새로운 시상식을 마련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그 밀도가 단단해졌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과학기술창작문예에서 출발한-혹은 그 전부터 태동하고 있던 황금기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이자 한국 SF가 여기까지 왔다는 하나의 증명이다. 정말이지, 변치 못할 옛사랑이다.

dcdc
영화배우 김꽃비의 팬. SF작가. 장편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단편집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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