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여성들│② 김연경부터 백도라지까지, 올해의 여성들

2016.11.25
자신의 의지로 말하고 행동하며 나머지 여성들에게도 조금 더 나은 시대를 열어준, 2016년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

김연경, 이보다 더 멋있을 수 없는 여자
세계를 통틀어 배구를 제일 잘하는 여성이고, 연봉도 가장 높다. 한국 여자 배구선수 중 사상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선수인 동시에 MVP, 득점상, 서브상 등을 골고루 휩쓸다시피 했다. 무엇보다 코트 안에서 강력한 스파이크를 꽂아 넣고 온 얼굴로 기쁨을 표현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오르는 김연경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도 힘을 불어 넣는다. 아무리 뛰어나도 겸손할 것이 여성의 미덕처럼 여겨지지만, 김연경은 자신의 장점을 굳이 숨기려 하거나 과하게 쑥스러워하지 않는다. 현역 선수 중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본인이라 말하고, 세계 배구선수 미모 1위라는 결과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맞다고 인정할 뿐이다. 게다가 지원이 거의 없어 리우올림픽 현장에서도 통역을 대신 맡고, 경기 후 김치찌개 집에서 회식을 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기량과 빛바래지 않는 우아함은 누구든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심지어 “많은 분들이 제가 배구를 하면서 이룰 건 다 이뤘다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만족이라는 게 없듯이 항상 코트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도록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MBC [나 혼자 산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대체 얼마나 더 멋있을 생각인가. 
  
원더걸스, 성공적인 리부트
모두가 알 듯, 원더걸스는 말 그대로 ‘국민 여동생’이었다. 깜찍한 표정을 짓고 살랑살랑 춤을 추며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봐”(‘Tell Me’)라고 노래하는 십 대 소녀들을 예뻐하지 않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인기는 영원하지 않고, 그리 화려하지 않았던 미국 진출과 리더 선예의 결혼, 소희의 탈퇴 등을 연달아 겪으며 새롭게 등장하는 걸 그룹들 사이에서 이들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다. 적어도 2015년 8월, ‘I Feel You’를 들고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기타와 드럼을 연주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원더걸스의 모습은 성공적인 컴백으로 손색이 없었으며, 2016년 7월, 직접 작사‧작곡한 ‘Why So Lonely’를 통해 원더걸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리부트에 마침내 성공했다.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권태를 느끼기는 여성의 복잡한 마음은 그동안 박진영이 프로듀싱했던 그들의 노래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웠고, 남자 마네킹을 묶어두고 발길질을 하거나 폭탄을 설치하는 등 얼핏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뮤직비디오 속 장면들은 원더걸스가 귀여움 받는 걸 그룹의 포지션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리고 예은은 [엑스포츠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신은 꽃이 아니라 높이 날아올라 세상을 보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새라고, 그런 주제의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아무래도 원더걸스의 다가올 10년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를 것 같다. 

엠버, 있는 그대로의 엠버 
엠버는 데뷔 후 단 한 번도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무대에서 스커트를 입지 않았다. 그것은 별난 소녀들의 모임 같았던 f(x)에서 ‘톰보이’ 담당 멤버로서의 전략이라기보다는, 엠버 자신의 고집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녀다움이나 여성스러움과 한결같이 거리가 멀었던 그는 국내로 한정하자면 f(x) 멤버 중 크게 주목받는 편이 아니었고, MBC [일밤] ‘진짜 사나이’에서 “잊으시오”라고 부족한 한국말로 울망울망하면서도 열심히 훈련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호감과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엠버가 바느질을 능숙하게 해내거나, [나 혼자 산다]에서 집을 청소하고 강아지 털을 다듬는 등 집안일을 하는 장면에는 ‘천생 여자’ 혹은 ‘반전 매력’이라는 수식어가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엠버는 사람들이 원하는 프레임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대신 머리가 짧고 바지를 즐겨 입는 자신도 있는 그대로 여성이라고, “아름다움은 모든 형태와 크기로부터” 나온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이돌과 걸 그룹,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는 f(x)로 활동하는 한편 가까운 친구들과 유튜브에 직접 만든 영상을 올리기도 하고,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엠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Borders’의 가사처럼, “Stand up straight, fight your way”.

이시영, 강한 여자
‘진짜 사나이’는 군대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 혹은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이끌어내려는 프로그램이었다. 심지어 남성과 여성을 함께 섭외한 ‘진짜 사나이 2’ 해군부사관 편은 성 대결 구도를 연출하려는 의도가 빤하게 보이는 특집이기도 했다. 인천시청 복싱팀에 정식으로 입단해 선수 생활을 하기도 한 이시영은 프로그램의 덫에 좀처럼 걸려들지 않는 에이스였다. 출연자들을 통틀어 윗몸일으키기 기록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3km 달리기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을뿐더러 해군기본소양교육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앞서 나갔지만 자신보다 역량이 부족한 출연자들을 놀리거나 얕잡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동안 주로 남성들에게만 허락됐던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 혹은 영웅의 자리를 차지한 여성이 되었다. 아무리 김희철이나 강호동이 성형 수술을 소재 삼아 놀려대도, 이수근이 여배우라는 직업을 핑계 삼아 편견을 드러내도 절대로 깎아내릴 수 없는 이시영의 위엄이다. 

이경미 감독, 불완전한 여성의 발
이경미 감독이 연출하고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영화 [비밀은 없다]의 누적 관객수는 약 25만 명이다. 여성 배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은 한국에서 흥행하기 쉽지 않고, 그중에서도 여성의 모성애나 순정을 부각시키지 않는 이야기는 폭넓게 소구하지 못한다. [비밀은 없다]의 여성들은 낯설고 불편하다. 주인공 연홍은 정치인인 남편을 고분고분 뒷바라지하는 여성이지만 딸을 잃은 후 다정다감한 아내의 얼굴을 벗어버리고, 그의 딸 민진(신지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잔인해지기까지 하는 중학생이다. 손소라(최유화)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마음 약한 선생인 척 위장할 수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여성이 깍두기처럼 끼어 있지 않고 온전한 몫을 차지하는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시장에서, 남성에게는 자리를 거의 허락하지 않고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여성 캐릭터들을 이 정도로 밀어붙인 건 흥행 성적을 떠나 의미 있는 시도다. 완벽하지도 않고 무조건 선하지도 않은, 복잡다단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비밀은 없다]에 있었다. 

서유리, 전투력 100%의 ‘트잉여’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미스 마리테’, 각종 애니메이션과 온라인 게임의 더빙에 참여한 성우, 남성을 주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출연자이자 코스프레를 즐기는 여성. 어떤 이들은 서유리에게 예쁘고 섹시하기만을 요구할 뿐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서유리는 트위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공격해오는 이들과 맞서고 있다. 지난해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적 경향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가 한 유저로부터 공격적인 메시지를, 소라넷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후에는 시비에 가까운 반론을 받았다. 지난 5월에는 경희대에서 여성혐오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었지만 극심한 ‘악플’과 항의 때문에 무산됐다. 물론, 서유리는 적당히 물러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소라넷이 폐쇄됐을 때는 “*경*축* 소라넷 서버 폐쇄 만세!!!”라는 트윗을 남겼으며, 여성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담기도 힘든 수준의 ‘악플’을 남긴 이들을 고소하기 위해 준비 중이니, 서유리를 공격하고 싶다 해도 안 돼, 봐줄 생각 없어, 돌아가. 

진선미 의원, ‘열일’하는 국회의원
진선미 의원은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계기로 이전보다 좀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청래 전 의원의 뒤를 이어 열여덟 번째로 등장한 그는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이라며, “비합리적인 의심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는 권력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칼이 된다”고 말했다. 조명받지 못하는 소수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구석에 주목하는 진선미의 특기는 서울 강동구갑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꾸준히 발휘되는 중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사업에 사용한 예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밝혀내고, 소방공무원이 퇴직 후 발병한 질병에 대해서도 특수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개정법률안을 발의하고, 장애인들의 투표 편의와 알 권리를 보장하고 선거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으며, 동물복지법을 발의해 경찰청이 처음으로 ‘동물학대사범 수사매뉴얼’을 만들도록 했다. 무엇보다 성관계 등 민감한 사생활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 관련 법안을 발의함으로써 소라넷 폐지에 힘을 싣기도 했다. 여성들에게 든든한 국회의원이자, 존재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인 것이다. 

백도라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던 농민회 소속 백남기 씨가 경찰이 쏜 캡사이신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뇌출혈 증세로 약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2016년 9월 25일, 결국 사망했다. 국가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면을 많은 이가 목격했음에도 정부와 경찰은 전혀 과잉진압이 아니었다고, 그것은 불법시위였다고 책임을 회피하기만 했다. 장장 10개월에 걸친 지리한 싸움을 의연하면서도 강경하게 이어간 건 고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 그중에서도 백도라지 씨였다.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에 계속해서 항의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와 그 가족을 감상적으로 포장하고 소비하려 하는 일부 언론과 사람들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하며 오로지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데 힘쓰라고 외쳤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가 피해자들에게 조용히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을 요구할 때, 백도라지 씨는 틈틈이 운동을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SNS에서 화장품을 추천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하며 지내기도 했다. 몇 차례나 고 백남기 농민을 강제로 부검하려던 정부의 시도가 무산되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기까지는, 피해자의 딸이자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삶의 균형을 지켜내며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백도라지 씨의 힘이 컸다. 

이화여대 학생들, 다시 만난 세계의 주인공들
시작은 ‘미래 라이프 대학’ 신설 때문이었다. 이화여대는 성적이 뛰어난 여성들이 진학하는 대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래전부터 여성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평가절하 되어왔고, 이번에도 어떤 이들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을 반대하는 이화여대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밥그릇 지키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일 동안 학교를 점거하면서, 돈을 받고 학위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는 대학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와 그의 딸 정유라의 학점 특혜 사실이 밝혀졌으며,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국정농단의 실마리 또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잘못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더 나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은 이화여대 학생들이야말로 현 정부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11월 16일, 최경희 총장에 이어 드디어 ‘실세’로 불리던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까지 사임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서로의 팔짱을 끼고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신호였을지도 모르겠다.

‘OOO내_성폭력’ 공론화 여성들, 세상을 바꾸는 용기
계기는 한 성인 남성은 미성년자 여성에게 노골적인 성적 요구를 하면서도 나이 차와 관계없이 합의된 관계라고 말했으며, 이는 곧 서브컬처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위계, 그리고 성폭력에 관한 논의와 공론화로 이어졌다. 한 여성은 청소년 시절 당했던 성폭력을 뒤늦게 인지했다며 가해자 남성과 해당 사건에 관련된 웹툰 작가를 공개적으로 밝혔고, 미술계에서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줄줄이 이어진 여성들의 고백으로 성폭력과 추행을 일삼아온 남성 큐레이터들의 정체가 탄로 나기도 했으며, 문학계에서는 주변의 여성들에게 행해온 박범신 작가의 추태가 밝혀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분야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남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행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분야에서든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이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냐’거나 ‘행동을 조심하지 않은 네가 문제’라고 쉽게 손가락질하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 사실을 공론화한 당사자가 도리어 매장당하기 쉬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다음 피해를 막고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 여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지지받아 마땅하다. 싸움은 공론화에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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