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담], 레즈비언의 ‘자기만의 방’

2016.11.28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며 콘텐츠 속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늘 고단하고도 꾸준하다. 이건 마치 호기심 충만한 어린아이들이 국어사전을 뒤져서라도 ‘야한 단어’를 찾아 읽으려 애쓰는 모습과 닮았다. 15년 전, 지금은 없어진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언니’들이 보라고 추천했던 영화 [더 월 2]를 구하려고 비디오가게에 갔더니 주인아저씨 왈 ‘그 영화에 2탄이 어딨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더 월 2] 외에 그 시절 내가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본 대부분의 영화들은 대체로 레즈비언을 등장시키는 대가로 동성애를 일탈 혹은 범죄와 버무리거나, 이성애자들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용도로 소비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래도 감지덕지였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도 봤고 [안토니아스 라인]도 봤으며, [바운드], [지아], [처음 만나는 자유],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도 봤다. 다시 말하자면 오래된 국어사전에서 ‘성교’라는 단어를 몰래 찾아 읽던 초등학생의 심정이었다.

물론 우리에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하 [여고괴담 2])가 있긴 하다.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 탓에 키스신 하나를 제외한 성애 장면이 대폭 편집되기는 하였으나, 시은(이영진)과 효신(박예진)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또 분명히 연인이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거대 레이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는 ‘거대 효신’이 유리 지붕을 통해 마지막으로 학교를 내려다보곤 제 갈 길 가더라는 결말이 몰입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고괴담 2]가 한국의 ‘레즈비언 씬’에서 갖는 의미는 부러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묵직하다. 이후 개봉한 여남은 편의 한국 영화들에서도 레즈비어니즘 코드 내지 흔적을 찾을 수 있기는 하나, [여고괴담 2]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다. 관객 대부분이 수인(손예진)과 경희(이은주)가 연인이었다는 암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섰던 비운의 명작 [연애 소설]처럼 그 흔적은 흐릿하거나, 혹은 여러 다른 목적을 위해 삽입된 장치에 불과했다. [연애담]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선뜻 몸이 나서지 않았던 건 위와 같은 경험이 축적된 탓이었다. 설령 원한다 해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겨우 집 근처 상영관을 찾아 뒤늦게 영화를 보았다.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은 대사가 참 적은 영화다. 시작하는 연인들이라면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게 보통인데, 이 영화에는 요즘 흔히들 쓰는 ‘카톡창 플로팅’ 같은 것도 한 번 안 나온다. 관객에 따라 공백이 많은 영화로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 특히 서울에서 2016년 겨울을 보내고 있는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들에게 [연애담]만큼 빈틈이 적은 영화는 없을 것이다. 윤주는 자기 이야기를 참 안 했지만, 윤주로 살아본 적 있는 관객은 그녀의 표정과 괜히 쿵쾅거리는 발걸음에서 무음의 방백들을 전부 읽어낼 수 있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이 영화에 대사가 적다는 것과 사운드트랙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걸 깨달은 건 뒤늦게 [씨네21]에 실린 인터뷰를 읽고 나서였다.

이런 영화이고 보니 ‘덕후’들은 곤란해한다. 감독이 묘사하지 않은 장면과 상황에 대한 2차 창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가 너무 우리의 삶 그대로라 판타지로 만들 여지가 없다. [캐롤]의 테레즈(루니 마라)만 해도 백화점 점원이었지만 예쁘게 칠한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연애담]의 윤주는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 룸메이트는 남자친구를 집으로 불러 거실에서 치킨을 먹을 정도이니, 이 집에서 주도권을 쥔 것이 윤주가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지수도 마찬가지다.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지수는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자취를 접고 인천의 본가로 들어오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미국 영화 주인공들은 겪을 일이 없는 시련이다.

영화는 고만고만한 삶들을 계속해서 훑는다. ‘한국에서 만든 레즈비언 영화니까’ 하면서 예상 내지 각오했던 장면들, 그러니까 온라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즉석 만남’의 광경이나 홍대 앞 모 레즈비언 클럽의 금요일 풍경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이 나왔고, 주방분리형 원룸 옥탑방이 나왔고, 밤늦은 시간의 택시와 출근길 지하철, 그리고 시외버스 막차 시간이 계속해서 언급됐다. 미드에 나올 법한 ‘부모님께 들켜서 커밍아웃하기’ 같은 극적인 시퀀스도 없다. 대신 여느 평범한 기성세대들이 할 법한 현실적인 잔소리들이 자잘하게 사방을 둘러치는 식이다. 외려 자잘해서 더 현실적이고 갑갑하긴 하다.

둘의 연애에 닥쳐온 위기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내려진 시한부 선고도 아니고, 알고 보니 우린 자매더라는 출생의 비밀도 아니다. 지수가 서울의 옥탑 자취방에서 짐을 빼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의 본가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커플은 ‘자기만의 방’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맞이한다. 서울에서는 그렇게나 자유분방했던 지수였건만 아버지가 있는 인천에서는 수족이 묶인 것처럼 군다. 오죽했으면 담배도 맘대로 못 피우고 전화기도 꺼놓을 지경이다. 둘의 재회 또한 윤주가 친구 집에서 쫓기듯 나와 ‘자기만의 방’을 만들게 되는 때와 동시에 이루어진다. 윤주-지수 관계의 레버리지를 갖고 있는 것도 결국은 건물주들이었던 거다. 먼저 들이댄 윤주도 연애에 능숙한 지수도, 방 빼라는 사람 앞에선 아무 힘이 없다.

영화의 결말을 앞두고, 관객은 어렵게 만들어진 윤주의 방에 지수와 함께 초대된다. 우리가 그 방에서 처음으로 발견하는 유일한 가구는 미대생의 미감에 보기 좋을 리 없는 갈색 소반이다. 시골서 제사 때 저런 밥상에다 탕국과 냉수를 날랐던 것 같은데 윤주는 그걸 사이드테이블로 쓰고 있다. 거기서 드러나고 마는 에누리 없는 청춘의 삶이, 사람들 다 있다는 고양이도 한 마리 없는 삶이 너무 구차하고 고달프다. “아빠, 나 그 오빠랑 결혼할래”라는 말에 결혼자금을 대주는 부모는 있어도 “나 그 언니랑 같이 살래” 하는 딸에게 전셋돈을 빌려주는 부모는 없는 현실도 자꾸 끼어든다. 이쯤 되고 보면 이 영화의 주된 테마가 ‘레즈비언 러브 스토리’인지 ‘청년실업과 부동산 위기’인지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아는 곳이 많이 나와 좋았다. 심지어 내가 집에서 걸어 나와 [연애담]을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향하던 길이 영화에 그대로 나와서 놀랐다. 마블 코믹스 팬들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의 한국 로케이션 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게 이래서였나 싶다. 당시 [어벤져스] 한국 촬영을 두고 ‘가난하고 위험한 분단국가’로 여겨지던 한국이 비로소 첨단 IT 연구소가 있는 잘사는 나라로 그려진다는 데 의의를 두자던 의견이 있었다. 비유가 좀 튀나 싶지만, [연애담]을 보는 우리의 기분도 그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랗게 물들이거나, 부러 거칠게 굴면서 마초 흉내를 내는 레즈비언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퀴어영화치고 ‘호모포비아’를 전면에 바짝 내세워 묘사하지 않은 점도 [연애담]을 2016년에 어울리게 만든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윤주와 지수를 일상적으로 괴롭히는 건 차라리 청년들에게 유독 혹독한 주거환경 같다. 이성애 결혼을 통해 부모의 재산을 증여받지 않고서는 삶의 질을 개선할 여지가 없다시피 한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윤주와 지수의 방에 놓여 있던 프레임도 없는 매트리스들을 생각한다. 지난 내 연애사를 곱씹는 건 그다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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