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시에서 발화(發花)한 뮤지컬

2016.11.30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창작 초연│2016.11.05~ 2017.01.22│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연출: 오세혁│작: 박해림│작곡: 채한울│가사: 백석·박해림·채한울│출연: 강필석·오종혁·이상이(백석), 정인지·최연우(자야), 안재영·유승현(사내)
줄거리: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잊지 못해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살았던 기생 자야. 세월이 흘러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앞에 돌연 시인이 나타난다. 말쑥한 차림,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는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는데….

★★★☆ 시에서 발화(發花)한 뮤지컬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낭만적인 시인과 시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공연이 아님에도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유독 곱다. 원전이 된 백석의 시가 가진 고유의 미감에, 백석과 그의 시를 인생보다 아꼈던 한 여성의 삶이 보태지고 적정한 조합과 개입의 정도를 아는 창작진, 친근한 소극장의 분위기가 뒷받침한 덕분이다. 모든 요소가 제대로 만났을 때, 어떤 창작 뮤지컬이 태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

Love: 백석을 향한, 자야의 연가
한국 문단 사상 제일가는 미남, 남북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천재 시인. 세상은 백석을 이렇게 평가한다. 뮤지컬은 백석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던 기생, 자야 김영한(이하 자야)의 시선을 더한다. 백석의 시가 뼈대가 되지만 엄밀히는 자야의 생을 따라 가는 셈이다. 그녀의 눈으로 바라본 백석은 영원히 젊고 총명한 예술가이자, 시 한 줄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주었던 불멸의 연인이다. 때문에 작품 속에서 자야가 ‘나타샤’의 실존 모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중요하지 않다. 분단이 갈라놓기 전, 사랑했던 3년을 평생 회고한 자야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 모든 장면이 자야와 그녀가 기억하는 백석처럼 시적이다. 백석과 함께 살기 위해 다시 요릿집에 나가게 된 자야의 희망과 절망은 ‘붉은 치마’ 하나로 상징되고, 흰 눈 덮인 대밭 사이로 오가는 백석의 걸음은 곧 시가 된다. 자야의 삶이 가장 시적으로 표현된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만나기도 전에 발표된 시 ‘여승’을 바탕으로 한다. 일평생 백석을 기다리다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며 전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자야의 말년과 맞물린다. 뮤지컬은 애틋해도 과하지 않고, 처연해도 초라하지 않게 자야의 순정을 전하는 연가로 태어난다. 백석의 시가 자야에게 그러했듯이.


Music: 음악이 된 시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바다’) 백석의 시는 그 자체로 노래다. 읊조리기만 해도 운율을 만든다. 대부분의 시가 운문이 아닌 산문 형태임에도 재치 있는 의성어나 의태어, 말하는 듯한 어미의 사용으로 말맛을 살리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그저 백석의 시들을 각색하고 가사를 세심하게 고르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적인 확장까지 꾀한다. 피아노 한 대의 연주만으로 ‘바다’를 비롯해 ‘흰밥과 가재미와 우린’, ‘여우난곬족’ 등 스무 편 가까이 되는 시에 선율을 입혔다. 감성적인 연주는 이내 젓가락으로 밥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어야 할 법한 트로트 느낌의 선율, 우아한 재즈와 청량한 가곡, 심지어는 오페레타를 방불케 하는 백석과 자야 그리고 해설자의 삼중창 등으로 넘나든다. 정주, 통영과 만주 등지의 향토적인 방언들이 바탕이 된 백석의 시어는 가사와 대사로 다듬어져 넘버의 예스럽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왜 이제서야 백석의 시가 뮤지컬로 만들어졌는지 의아할 정도로 각 넘버의 연결마저 조화롭다. 진정 영리한 한 수는 마지막 넘버에 있다. 차근차근 쌓아 올린 감정들의 최정점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등장시킨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시 낭송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노래에는 아무리 메마른 감성이라도 습격당할 수밖에 없다.

Seeya: 젊은 창작자들의 발견

대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크레딧을 들여다보면 다소 낯선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백수들]을 작업한 박해림 작가와 뮤지컬 [난쟁이들]·[무한동력]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채한울 작곡가. 두 사람은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창작자 및 스태프 육성프로그램인 ‘시야 플랫폼: 작곡가와 작가’로 만나 함께하게 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박해림 작가가 평소 즐겨 찾던 길상사에서 모티브를 얻으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원작의 세계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매끄러운 흐름과 흡인력을 갖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장대한 여정이 필요했으며, 그중 시야 플랫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작품의 발아 단계부터 정기적으로 기성 창작진들의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배삼식 작가와 이지혜 작곡가가 각각 각색과 작곡 부문에 멘토로 참여했다. 창작 마당극에 주력해와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극단 걸판의 오세혁 연출과의 만남도 시야 플랫폼을 통해 성사되었다. 그렇게 2월, 완전체가 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쇼케이스로 시동을 건다. 여기에 관객의 평가까지 반영해 아홉 달이 지난 11월에서야 본 공연을 선보이게 됐다. 아마도 두 젊은 창작자들의 대표작으로 남게 될 거의 첫 작품. 명작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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