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힙합│② 슬릭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가사로 쓰는 거다”

2016.12.06
래퍼 슬릭은 [마이크 스웨거 2]에서 이렇게 랩했다. “여긴 아직도 기집애라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 아직도 아무도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모른다면서”. 그리고 선언. “(내가) 지금부터 이 바닥의 제대로 된 HELL OF **** FEMINIST”. 혐오와 차별적 표현도 개성으로 이해되곤 하는 힙합신에서, 슬릭은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마이크 스웨거 2] 출연 이후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슬릭
: 너무 갑자기라 좀 무섭다. 내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웃음) 사실 내가 속해 있는 레이블, 데이즈얼라이브의 대표 제리케이 씨가 예전에는 시국선언도 했고, 이번에 광화문에서 ‘HA-YA-HEY(하야해)’를 부르기도 했다. 정치적 이슈에 대해 꾸준히 우리가 목소리를 내도 그동안은 ‘왜 이렇게 가르치려 들어? 그래서 난 얘네 노래 안 들어’ 이런 식의 반응이 많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이 폭발하는 걸 보면서 데이즈얼라이브 식구들은 다들 처음 겪어보는 사랑과 관심에 놀라고 있다.

왜 그 자리에서 힙합신의 혐오 가사 문제를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슬릭
: 가사를 쓰면서도 ‘이러면 반응이 뜨겁겠지?’라는 생각보다는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난 트위터로도 그렇고, 친구들 앞에서도 그렇고 항상 페미니즘이나 차별적인 지점에 대해 말하고 있었거든. 그렇다 보니 딱히 다른 가사를 쓸 것도 없더라. 녹화를 하고 나서는 약간 두려웠다. 힙합을 듣는 사람들 중 이런 걸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많다 보니 내 앨범을 불태워버리지는 않을까, ‘중고나라’에 헐값에 팔아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름대로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다.

예전부터 힙합 커뮤니티에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본인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 않았나.
슬릭
: 그렇기 때문에 [마이크 스웨거 2]에서 ‘헬 오브 페미니스트’라고 아예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슬릭은 페미니스트인가요?’ 이런 글도 있다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어쩌라고?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웃음) 페미니스트 맞는데 어쩌라고.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할 건데. 나를 뭐, 해치러 올 건가?

랩 중에 “(여긴)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라는, 성소수자 혐오에 관한 지적도 있었다.
슬릭
: 말이 나온 김에 이건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 가사를 쓰니까 어떤 분이 ‘왜 게이를 욕으로 쓰면 안 되냐. 그럼 ‘소아성애자’라는 단어도 욕으로 쓰면 안 되냐?’라고 하시더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어떤 소아성애자들처럼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상대에게 강제력을 행한다면 그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범죄의 영역이다. 반면 게이를 비롯한 성소수자는 성적 정체성이자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동일선상으로 묶일 일이 아닌 거다.

데이즈얼라이브 내부적으로도 혐오 표현을 걸러내는 작업이 이뤄지나. 
슬릭
: 여전히 우리 스스로 자정하는 일이 첫 번째다. 다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 무엇인지 완벽하게 숙지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섣불리 이런 생각을 랩으로 막 쏟아냈다가는 오히려 옳은 생각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가치들을 랩으로 만들어보자, 까지는 아니고 아직은 어떤 이슈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말하거나 곡으로 만들 때 조심하자,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거에 만들었던 노래들 중에서도 ‘이런 부분에서 좀 반성을 해봤어’라는 의견을 주고받을 때가 있고.

그러고 보니 지난 6월에 ‘Rap Tight’의 ‘병신’이라는 가사에 대해 SNS로 사과했다.
슬릭
: 그 곡은 2014년에 발표하고 2016년에 앨범 버전으로 재녹음을 했다. 재녹음을 하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병신’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면 똑같이 녹음을 한 다음 거기만 어떤 효과를 줘서 없애버려야 할까? 그런데 새로 만든 노래가 아니라 있는 노래고, 내 노래 중에는 그나마 가장 대표적인 곡이고,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건데 내가 모른 척하고 다른 가사를 넣거나 숨긴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지. 그냥 원래대로 내고, 사과라기보다 반성을 하자고 생각했다. 마침 SNS에서 어떤 분이 ‘슬릭 이 가사 별로야’라고 말씀 하시길래 바로 사과문을 올렸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부분이고 시간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2014년과 2016년의 자신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슬릭
: 그 가사를 쓸 당시의 나는 무지했던 것 같다. 의도적으로. 빨리 유명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유명해지고, 어떻게 더 잘해서 많은 사람이 나를 실력 있는 래퍼로 인정하게 될까, 거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내 가사를 스스로 검열해봐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못 했던 거다. 외부 세계에 호기심이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달까. 물론 지금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훨씬 더 집중하는 편이지만, 이제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힙합에 갓 관심을 가졌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처음 랩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뭔가.
슬릭
: 노래 가사를 쓰고 가요를 개사하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 때였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랩 가사를 썼지. 소울컴퍼니 쪽이나 더블케이 같은 기성 래퍼들을 좋아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내 경우엔 랩을 좋아하는 것에 더해 잘했던 것 같다. (웃음) 친구들이 잘한다고 해주고, 녹음해서 커뮤니티에 올리면 잘한다는 댓글이 달리고, 내가 느끼기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 그래도 대학 초반에는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직업다운 직업’을 진로로 삼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작가라든지 회사원이라든지…. 결국 안 된 걸 보면 그쪽으로는 재능이 없었던 거지. 자연스럽게 학내 힙합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음악을 직업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나도 음악을 직업으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때쯤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기도 했고. 어쩔 수 없다, 한번 시작한 이상 망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 열심히 해봐야겠군, 싶더라.

아마추어 때는 어떤 이야기를 가사로 썼나?
슬릭
: 그때는 나의 정서에 더 집중했다. 내가 우울하다, 기쁘다, 이런 거. 그게 반이었고 나머지는 정말 힙합을 하는 아마추어들이 매일 하는 이야기였다. 내가 짱이다, 여긴 썩었다, 내가 고치겠다, 그런 거.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할 마음이 사라졌다. 다른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니까.

힙합신 특유의 가사들이 불편하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인가.
슬릭
: 얼마 안 됐다. 1, 2년 정도? 그동안 가사가 아름답다거나 듣기 좋다거나 하는, 말로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나만의 기준이 있기는 했다. 정확하게 이유를 대기는 어렵지만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곡들은 의식적으로 안 듣게 된 지 꽤 오래됐다. 그런데 1, 2년 전부터 혐오나 차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아, 내가 이것 때문에 어떤 노래들이 불편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국에서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지점들이 많았고, 어떤 특정한 곡이 여성혐오적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더라. 여성이 듣기에 불편하고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방식으로 비유를 쓴다든가.

SNS를 하지 않았다면 본인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던데.
슬릭
: 확실히 그랬을 거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소위 말하는 여성스럽다고 하는 부분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나 스스로를 카테고라이징 해봤을 때, 객관식으로 친다면 정체화할 수 있는 방향이 ‘명예남성’밖에 없더라. 그만큼 여성혐오적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살았던 거다. 내 안에 있는 특징들도 멸시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그거 여우짓이네’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듣는 입장에서는 올해 5월 공개했던 ‘One and Only’부터 입장 변화가 감지되더라.
슬릭
: 공개는 그때 됐지만 가사를 쓴 건 1년 정도 전이다. 혐오 발언을 하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은 시기와 조금 겹치긴 하는데, 그때 내 마음속에 가득 찼던 생각은 그거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겠다. 그래야 내가 아닌 타인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거고. 당시 켄드릭 라마의 ‘I’라는 노래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One and Only’의 주된 정서 역시 ‘I love myself’였다. 내가 나 스스로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지 이 곡을 듣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그런 마음을 갖게 될 것 같더라. 쉽게 말하자면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말, 누가 나한테 해줬으면 하는 말을 가사로 쓴다.

랩에 센 표현이나 비속어, 비하 발언 등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위 ‘간지’가 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시선도 있지 않나. 그런 표현을 걷어내고 가사를 쓰는 건 실제로 예전보다 어려운 작업이던가.
슬릭
: 가사를 쓰는 건 항상 힘들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고통이 가중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속어나 혐오 발언, 이건 그냥 의식적으로 안 넣으면 된다. 그걸 넣지 않는다고 해서 곡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 음악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게끔 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자신도 없고. 물론 나 역시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혐오 표현에 익숙해진 부분이 있고, 가끔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쓰면 간지 날 것 같은데?’ 싶은 때도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간지’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 표현인데 이걸 굳이 써서 ‘간지’가 나면 뭐해. 한마디만 더 하자면, 다른 래퍼들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각했으면 좋겠다. 본인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가사가 누군가에게는 숭배든 멸시든 혐오든, 대상화되는 듯한 불쾌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랩=디스’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문제의 원인 중 하나일 것 같다.
슬릭
: 그래서 나는 Mnet [쇼 미 더 머니]나 [언프리티 랩스타] 같은 힙합을 주제로 하는 프로그램을 전혀 보지 않는다. 디스라는 말이 마치 힙합의 대체어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만드는 부분이 있더라. 힙합 혹은 랩 음악을 왜곡하고 있는 거지. 절대 그런 게 아닌데. 가끔 나한테 [언프리티 랩스타]에 안 나가냐고 묻는 분들도 계신데,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간다 해도 잘할 자신이 없고, 무엇보다 그 프로그램을 접하지 않는 입장이다. 세상에 볼 게 얼마나 많은데. (웃음) 요즘은 페미니즘 관련 기사를 읽는다든가, 페어에 간다든가, 영화를 보는 데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독립영화를 적극적으로 찾아보게 된 것도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그쪽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 래퍼는 뭘 하는 사람일까.
슬릭
: 음, 표현하는 사람이겠지. 랩을 포함해서 음악이라는 건,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큰 파급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듣고, 그 말이 지닌 의미가 더 커지는 효과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래퍼 또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하는 사람인 건데, 내 마음에 드는 건 이 방향이다. 누구를 혐오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

지금 랩으로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뭔가.
슬릭
: 처음 랩을 시작할 때는 ‘오늘부터 랩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거야’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랩을 잘하고 싶다, 정도의 마음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찾은 건 앞서 말했듯 되게 최근이다. 요즘은 사랑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어떤 형태든지 간에, 어떻게 이야기해야 더 적확하게 전달될까, 더 맞는 말일까를 고민 중이다. 사실 [마이크 스웨거 2]에서 각종 혐오에 대해 랩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머릿속에서 이미 앨범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앨범이 언제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 스탠스에서 많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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