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사랑이 전부인 공연일 수도 있어요”

2016.12.07
백석의 시에 노래를 붙인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타샤])는 그야말로 시와 같은 작품이다. ‘무엇이 어떠해서 그렇다’라는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순간의 감정이 먼저 와서 박히고, 배우들의 연기 역시 무엇을 더하는 것보다는 빼는 것으로 설렘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순간의 공기를 만든다. [나타샤]는 백석과 보낸 짧은 3년간의 기억으로 평생의 삶을 지탱해온 한 여성을 그린다. 하지만 뮤지컬은 그간 다양한 매체에서 봐왔던 지고지순한 여성의 스트레오 타입에 잔잔한 균열을 내며, 50년간 한 사람을 사랑해온 여성의 감정을 섬세하고 풍부한 결로 살려낸다.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애잔함을 품은 최연우가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공연 시작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제 좀 안정기에 접어들었나요?
최연우
: 보통은 그런 감이 있는데, [나타샤]에는 그게 없어요. 저는 백석과 자야가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날것이기를 원하거든요. 그렇다면 그동안 했던 것처럼 ‘어떤 인물을 보여주겠다’라는 형식적인 것보다는, 두 사람의 상태를 최대치로 보여주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공연 끝날 때까지 안정기라는 게 올까 싶어요.

왜 날것의 상태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연우
: 사실 [나타샤]는 그동안 제가 해왔던 공연 중 가장 갈피를 못 잡았던 작품인데요. 극 자체가 판타지 성향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나이 든 자야의 꿈에 젊은 시절의 백석이 등장해 그동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는 내용이니까요. 작년에 했던 [여신님이 보고 계셔]도 비슷했는데, 그때는 외형과 보이스톤으로 각기 다른 인물을 다 만들어냈거든요. 분명 여기서도 그렇게 했다면 50년의 사랑이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리얼하게 나이를 표현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제가 아무리 어떤 인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결국 저는 젊은 여자잖아요. 그 괴리감을 줄일 수 없다면 왜 이 사람이 여태껏 백석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나를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3년간의 짧은 사랑과 긴 기다림이라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잖아요.
최연우
: 자야 여사의 저서 [내 사랑 백석]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분도 여자라는 거였어요. 왜, 여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앞에서 가장 아름다워진다고 하잖아요. 백석이 나를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주고, 마음이 늙지 않도록 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 사랑을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분명 살면서 강해지고 독해졌을 거예요. 백석과 생이별을 한 후에도 다른 사랑을 했을 테고, 실제로 자식이 있기도 하구요. 그런데 아마 ‘사랑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장 잘 느끼게 해준 사람이 백석 아니었을까.

늘 떠나기만 하는 상대에게는 원망이 강할 것 같은데, 오히려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최연우
: 자야가 백석과 함께 여행하면서 원망이 사라지는 걸로 노선을 잡았으면, 극으로서는 훨씬 더 재밌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면서 ‘이 여자에게 원망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야 이 남자를 맘 편히 보내줄 수 있겠다 싶고. 아마 살면서 ‘이 사람을 정리해야 될 텐데, 될 텐데’라고 생각만 해왔을 거예요. 그러다 ‘그래, 이젠 해볼까’라는 마음이 이 작품의 정서 아닐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라는 일대기가 아닌, 자야라는 여자의 마지막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체적인 틀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 감정을 확인하고 표현해내는 것이 배우 개인으로서는 더 힘든 작업이지 않았나요?
최연우
: 어떤 캐릭터를 입히지 않으려다 보니까 저로부터 시작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저 역시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다 내어주는 스타일이거든요. 내 지난 사랑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물론, 구체적인 것을 정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게 여전히 불안해요.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 중 어쩌면 가장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분명 질타도 있을 것이고, 이걸 해결해내지 못하면 안 하니만 못한 선택이 될 텐데 잘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을 해버리니까 이게 계속 욕심이 나는 거예요. 이걸 해낸다면 저 스스로도 성취감이 많이 들 것 같아요.

쉽지 않은 도전인데,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최연우
: 배우들도 경력이 쌓이면 ‘이건 이렇게 하면 돼’라는 게 생기거든요. 그런데 이 공연 연습하면서 (강)필석 오빠가 정형화되지 않은 연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늙은 자야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그 긴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하는 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감정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 라고. 나도 내가 해가는 길이 있고 시간이 필요한데, 저 오빠는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할까 싶었어요. 관객이 우리가 하는 걸 모르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그러다 이 공연은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동안 흩어져 있던 것들이 딱 모이더라고요. 깨달은 거죠. 아, 이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지 말고 손을 내밀어보자. 제가 하고 있는 자야는 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출이 아닌 배우가 배우에게 디렉팅하는 것,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최연우
: 이 작품의 주체는 자야지만, 자야만 보여선 안 되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야가 100퍼센트 경험한 일도 아니고, 백석의 시를 읽으면서 본인이 유추한 것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섞여 있으니까. 그래서 백석도 백석이었지만, 우리의 사랑을 지켜봐주는 사내들에게 계속 물어봤어요. 어때? 어떤 마음이 들어? 연기라는 게 정답이 없고, 배우가 배우에게 하는 디렉팅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연습이 진행될수록 더 답이 없어서 제가 직접 묻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었어요. 더 많은 조언이 필요했고, 더 수렴하려고 했고. 그래서 아주 좋은 산을 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이.

그런 변화 때문에 프레스콜에서 “행복하다”는 소감을 밝힌 거였나요?
최연우
: 제작사에서는 이 작품을 7~8개월 전부터 하자고 하면서 대본을 안 줘요. 이거 엎어지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싶어서 (웃음) 개인적으로 찾아봤는데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더라고요. 사실 자야의 사랑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방적이에요. 하지만 연습을 하면서 느낀 건 이 긴 시간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이었어요. 사랑은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야는 몇십 년간 노력해온 거잖아요. 공연 마지막에서야 백석이 “내가 이 시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었거든” 하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부르는 순간, 이 여자가 이 말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싶더라고요. 너무너무 행복해서 산화될 것 같았어요.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준 순간이라서. 어쩌면 사랑이 전부인 공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단 100분 안에 50년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고마웠고 행복했어요.

지고지순한 캐릭터는 수동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데, 자야는 어떤 여자였던 것 같아요?
최연우
: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중등교육까지 받고 후에 대학도 가잖아요. 공부에 대한 열망도 깊고 욕심도 꽤 많은, 똑똑한 여자였던 것 같아요. 자야에게는 백석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부러운 사람이었을 거예요. 집안이 망하면서 기생을 하게 됐는데 언제나 스쳐가는 사람들만 있었을 테니까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거구요. 자신의 위치상 이 남자를 잡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이 사람이 나를 집이라 생각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 같은. 그래서 더더욱 이 사랑이 단순히 여자의 신파이길 원하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아내를 두고 자신을 만나러 온 백석을 향해 “남겨진 여인이 참 불쌍하네”라고 말하던 모습들이 자야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요. 2010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베르테르]) 때를 떠올리면 복잡한 내면의 여성 캐릭터를 더 설득력 있게 그리는 것 같아요.
최연우
: 저의 중심이 없던 때였죠. 너무 힘들어서 탈모도 오고 (웃음) 살이 너무 빠져서 얼굴 핼쑥해지고. 스스로를 너무 괴롭혔던 시간이었어요. 그동안은 어떻게든 견디려 했고, ‘해낼 거야!’ 같은 게 있었는데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그게 사라져버렸어요. 그냥 내가 지금 좋은 걸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면 좋은 거 아닐까. 어차피 부귀영화 누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난 무대예술이 좋아서 들어온 거였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해낼 수 있는 것, 남들이 나에게서 보기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특화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예전에는 하나를 향해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이 넓어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한 게 지난 1~2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관객들도 그 변화를 감지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요즘의 저를 보면서 ‘왜 안 하던 짓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지 제가 무대 위에서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어떤 게 두려웠던 거예요?
최연우
: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보고 ‘너무 좋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쟤 캐스팅 왜 했어?”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게 주목적이었어요. 욕먹지 않기 위한 것에만 급급해지니까 즐거움이 사라지죠. [베르테르] 때 ‘내 드라마를 믿고, 나를 칭찬해줄 줄 알아야 된다’는 말도었는데 그때는 뭐 그런 말 하나도 안 들리죠. (웃음) 여전히 지금도 왔다 갔다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내가 왜 다른 것들에 짓눌려서 이겨내려고 악에 바쳐서 해왔나 싶어요.

자신의 장점을 찾아서 특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최연우만이 할 수 있는 건 어떤 건가요?
최연우
: 전에는 제 장점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들어오는 것에만 충실했지, 따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실제의 나는 털털한 편인데 제가 하고 있는 역할들은 소위 여성성이 강한 인물이더라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함이 있고. 예전에 어떤 관객이 그런 말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사랑은 정말 뜯어말리고 싶은 사랑인데, 너무 행복해해서 말릴 수가 없다고. 그 얘기를 듣는데 ‘맞아요!’ 싶은 거예요. (웃음)

그렇다면, 장점과는 별개로 더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나요?
최연우
: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되게 날카로운 여자를 해보고 싶어요. 혹은 내면이 섹시한 여성. 앞으로 다양한 성격과 배경, 상황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싶어요. 분명 그런 캐릭터라도 제가 하면 제가 가진 쓸쓸함이 또 나오긴 하겠지만요. (웃음) 그래서 요즘은 아예 제작 초기 작업부터 참여해서 그런 캐릭터를 함께 구축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나타샤]도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니까요. 한국 뮤지컬 시장에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많지 않아서, 풍부한 결을 가진 자야는 많은 배우가 해보고 싶은 배역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어차피 제가 정말 자야일 수 없고 상대 배우들도 백석일 수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이 계속 공연되어서 또 다른 백석과 자야들이 쌓여서 아주아주 풍부한 인물들이 되면 좋겠어요.

내면의 섹시함이라는 건 어떤 거예요?
최연우
: 사실 이 작품 안에도 섹시함이 있어요. 드러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북관의 계집’ 신인데, 백석이 떠나고 다시 살기 위해 요릿집에서 일하는 자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거든요. 캐릭터적인 부분을 많이 버린 상태로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안무 선생님께 이 여자의 프로페셔널한 모습과 현재를 견뎌내는 모습을 섹시하게 표현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한복이 주는 섹시함을 최대한 살리고, 어떻게 해야 선이 섹시해 보이고, 그 섹시함이 안타깝게 다가올까에 대한 고민과 함께 동작을 만들어냈어요. 개인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자기 일을 충실히 해낼 때 나오는 섹시함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것으로서의 섹시함’은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연우
: 연기라는 것은 나이와 비례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멀었지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는 게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가진 분위기나 색깔에 대해서도 이제는 조금 알게 될 것 같고. 정말, 이제 조금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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