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순정만화의 시대

2016.12.07
지난 6월부터 청강만화역사박물관에서 제16회 기획전시 [여성의 세계-소녀, 어른이 되다]가 열린 뒤 ‘어째서 반드시 조명돼야 할 90년대의 순정만화가 빠져있는가’라는 지적이 있었다. 전시회가 이 시절 순정만화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웹툰 플랫폼 코미카에서 한국 만화의 전설적 명작 여섯 편을 웹툰으로 재구성해서 연재한다는 기획에도 유독 순정만화는 단 한편도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왜 이 시절의 순정만화가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홀대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순정만화는 악명 높은 심의 규제로 1970년대 중반부터 급기야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1979년 일본 만화 [캔디캔디]가 해적판으로 들어온 뒤 순정만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음에도 그릴 작가가 없을 정도였다. 1980~90년대의 순정만화는 이런 토양에서 시작됐다. 당시 작가들은 해적판이지만 일본 만화책들을 스승 삼아 독학을 통해 작가가 됐다. 한 번 맥이 끊기는 바람에 활극 만화를 그리는 대부분의 남자 만화가들처럼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업형 화실과 위계질서가 존재할 수 없었다. 더불어 늘어난 수요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현실이 신인 데뷔에는 오히려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1988년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순정만화 잡지가 창간하면서 작가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잡지만화는 대본소보다 페이지당 고료가 그나마 높고, 작업분량도 적어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기 좋았다. 무엇보다 중·단편 위주의 작품 발표가 가능하다 보니 중편이나 단편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작가들, 또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도 데뷔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댕기]가 창간돼 김진의 [바람의 나라], 이은혜의 [점프 트리 A+], 김혜린의 [불의 검], 원수연의 [풀하우스] 등 지금도 회자되는 작품들이 나왔다. 또한 [르네상스]의 신인 공모 당선으로 데뷔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가 [댕기]에서 신선한 단편과 중편 연재작을 선보이며 신세대 작가 중 독보적인 인기를 끈 유시진, [댕기]의 창간부터 고속 성장을 주도한 편집장이 서울문화사로 옮겨가 창간한 [윙크]에서 전략적으로 내세운 신인 작가 나예리, 박희정 등은 이전 단행본 시절 순정만화 작가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그림체를 선보였다. 그리고 [윙크]의 신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등장한 천계영은 이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작품을 선보였다. 바로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이다. 데뷔작부터 연달아 선보인 일련의 작품들은 그림도 연출도 캐릭터의 개성도 90년대의 아이콘 같은 ‘신세대’ 그 자체였고 경이로움이었다.

그러나 당시 순정만화는 이런 역동성에 비해 주류 매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순정’이라는 이름부터 명백하게 차별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고, 미디어에서는 ‘비현실적인 서양 배경의 서양 인물’, ‘의미 없이 꽃 배경이나 점만 휘날리면서 얼버무리는 허술한 그림체’, ‘울고 짜는 신파 연애물밖에 없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치, 퇴폐 조장’ 등으로 순정만화를 비판했다. [북해의 별]은 로코코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어느 왕국에서 왕정을 몰아내고 민주 정부를 세우기까지의 험난한 혁명과 민중 투쟁을 다뤘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주변에 존재한 가상의 부족국가에서 신탁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는 여왕과 그 자매들의 인생역정을 다루면서 대하 사극 드라마의 역동성과 무게감을 충실히 보여줬다. 그러나 미디어에서는 앵무새처럼 뻔한 비판들이 반복됐고, 순정만화는 ‘여자들이나 보는’ 만화라며 수준 낮고 하찮은 장르라는 편견이 반복됐다. 심지어 1980년대 순정만화는 “한국 사람이 그린 것 치고는 스토리의 짜임새나 스케일이 너무 대담”하다는 이유로 일본 만화를 베낀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1980~90년대 순정만화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만화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기록이다. 대본소 중심의 시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까치가 유행하면 모두가 까치 머리를 그리고, 20세 재벌이 흥하면 모두가 스무 살 청년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험 활극을 그려야 했다. 반면 순정만화는 종수는 적을지라도 작가마다 개성과 독창성을 중요시했고 각자의 세계관을 펼쳐 보였다. 단행본 시장에서는 물량을 제대로 댈 수 없어 열세에 몰렸고 터무니없는 공격과 비판도 받았다. 많은 작가는 생활유지가 힘들 정도로 곤란을 겪었고, 잡지사가 손쉬운 일본 히트작 수입에만 몰두하고 작품의 다양화를 등한시하면서 점점 작가들이 밀려나게 되며 힘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순정만화는 잠시나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열정의 시대였고, 오직 그것만으로 모두가 전력질주를 했던 시대다. 그나마도 짧은 백일몽처럼 끝나 평행우주의 다른 행성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아마 이 때문에 지금 순정만화가 거론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존재했다고 믿기에는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과 에너지가 있었고, 하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으니. 그리고 웹툰의 시대에, 다시 작가들이 척박한 토양을 딛고 나아가는 것이 차라리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오경아
클래식 음악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는 만화가. 현재 봄툰에서 [마녀와 집사] 연재 중.




목록

SPECIAL

image 여성 살해 스트리밍

MAGAZINE

  • imageVol.171
  • imageVol.170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