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국 여성 영화의 새로운 원년이 될 수 있을까

2016.12.08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은 소수자일까?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여성 감독’, ‘여배우’라는 단어가 불공평한 젠더 지위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영화계는 유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자 남성 영화 전용관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한국영화사상 여성에게 큰 자리를 내어준 시절이 있었던가?

얼마 전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의 홍보 인터뷰에서 배우 엄지원이 “브로맨스 너무 많이 봤잖나. 이젠 지겹지 않나? 여자들끼리도 케미스트리가 있다”라고 한 말에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SNS나 사적 커뮤니티에서만 맴돌던 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유명한 여성 배우가 직접 발화한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원한 일갈은 대리만족을 넘어 카타르시스에 가깝다. 더구나 [미씽]은 지난한 투자 과정을 거쳐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들이 의기투합해 동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힘 있는 필치로 써 내려 간 영화다. 최종 흥행 스코어가 어떻든 간에 개봉이라는 결과물로 증명해 냈다. 발언의 무게에 실리는 힘이 다를 수밖에 없다.

2016년은 ‘여성 영화의 새로운 원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예년에 비해 다채로운 여성 중심의 영화가 개봉한 해다. 순제작비만 120억 원이 넘는 블록버스터급 레즈비언 로맨스 [아가씨]의 등장과 김혜수의 원톱 영화 [굿바이 싱글], 주연배우 손예진이 영화의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제작비 10억 원을 투자하는 흔치 않은 선택을 한 [덕혜옹주]는 올해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20위 권 안에 안착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들이다. 아쉽게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며 담론을 형성한 [비밀은 없다]의 출현도 주목해야 한다. 더 나아가 유의미한 풍경은 [우리들], [범죄의 여왕], [죽여주는 여자] 등 아동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을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하며 담론을 이어 나간 것이다. 여기에 전면적이고 현실적인 레즈비언 로맨스 [연애담]이 가세해 정점을 찍었다. 현재 [미씽]은 개봉 5일 만에 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비수기에 개봉한 여성 영화는 안 된다’는 세간의 우려를 기분 좋게 따돌리고 있다. 더불어 힘을 더하는 것은 여성 감독들의 컴백과 데뷔다. 전작 [미쓰 홍당무]로부터 오랜만에 복귀한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 [미씽]의 이언희 감독, [좋아해 줘]의 박현진 감독, 그리고 놀라운 장편 데뷔작을 내놓은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연애담]의 이현주 감독 등은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버텨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사실상 이 흐름의 입구에 외화 [캐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캐롤]은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도 쉽게 제작되기 힘든 여성 중심의 영화에다 레즈비언 영화라는 점도 큰 반향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새로움에, 그리고 소외감에 목마른 관객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작품이었다. 포기되어 있던, 잠들어 있던 욕망을 깨운 셈이라고 할까. 오랜 갈증에 무뎌져 있다 막 목을 축인 참이라면 해갈은 오히려 더 큰 갈증을 부른다. 그런데 때마침 [아가씨], [연애담] 등이 속속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들의 작품성이 담보되었다는 점은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외화 [고스트 버스터즈]도 이 계보에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작품이다. 여름 블록버스터임에도 관객 수 50만 명을 조금 넘긴 정도니 성적은 좋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관람객 사이에서 상영관 확대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졌고, 잠시나마 박스오피스 역주행을 하는 등 관객이 ‘반응’했고, 움직였다. [비밀은 없다], [아가씨], [연애담] 등은 열광적인 마니아를 양산했다. 관객의 이러한 화답은 영화계에는 아주 중요한 신호다. 창작자에게는 보다 새롭고 위험한 것에 도전해도 좋다는 원동력과 지지의 기반으로, 투자자에게는 수익을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타깃 층 형성에 대한 기대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만나게 될 여성 중심의 영화는 벌써 꽤 있다. 우선 내년 1월 개봉하는 김하늘, 유인영 주연의 [여교사]가 있고, 배종옥 주연의 [환절기], 올해 상반기 [날, 보러와요]로 선방한 강예원과 한채아 주연의 코미디 액션 [비정규직 특수요원], [사도] 이후 문근영의 신작 [유리정원],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등이 주연을 맡은 [더 테이블] 등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촬영 중인 작품 중에는 살인 병기로 길러진 여성 캐릭터로 등장하는 김옥빈 주연의 [악녀]가 있다.

영화계는 올해 여성 중심의 영화가 의미 있는 성과를 냈으니 전보다는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고 어느 정도 기대하는 분위기다. 소위 ‘브로맨스’로 불리는 남성 중심의 영화에 제작 주체도 관객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것을 곧 여성 중심의 영화를 모두가 반기고 나설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오해다. ‘여성 영화’라는 라벨이 홍보 마케팅에 무조건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외면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야 없겠지만, 영화 안팎으로 소외됐던 여성의 자리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는 점만은 고무적이다. 분명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이 흐름이 몇 년간의 화양연화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좋은 ‘여배우’는 참 많다. 단지 그들이 출연할 영화가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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