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수잔],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는 여전히 필요하다

2016.12.09
“…요람을 찾아온 요정들 가운데 하나가 그녀를 데리고 그녀가 태어난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음이 틀림없다. 돌아와 다시 요람에 누웠을 때 그녀는 세상의 모습을 다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왕국까지도 이미 골라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영토를 통치하게 된다면 다른 어떤 것도 탐내지 않으리라고 약속했다. 따라서 열다섯 살 때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거의 갖지 않았으며, 자신에 대한 환상은 전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5년 평론집 [보통의 독자]에서 제인 오스틴을 이렇게 평했다. 가족의 기록 속 수줍은 무명의 여인이 아닌 관찰과 풍자의 대가,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제인 오스틴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하지만 왜 열다섯 살일까? 어째서 버지니아 울프는 다른 비평가들처럼 작가 제인 오스틴의 출발점을 [이성과 감성] 혹은 [오만과 편견]을 출간한 해가 아닌 십대 시절로 본 걸까?

답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레이디 수잔] 두 작품에 있다. 가족용 농담 정도로 여겨져 왔던 어린 시절 글들에 주목한 최초의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이 글들에서 제인 오스틴이 작가로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진지한 실험을 시작했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사랑과 우정]은 조지안 시대의 과도한 감상주의를 비웃고 있지만, 동시에 일탈하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제인 오스틴이 앞으로도 분별과 전복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가 되리라 예고한다.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 사이에 쓰였다고 추정되는 [레이디 수잔]의 자기 분열은 더욱 강렬하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저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분석했듯이, [레이디 수잔]에서 제인 오스틴은 여성의 창의력과 섹슈얼리티에 매혹되면서도 두려움을 느끼는 양가 감정을 드러낸다. 서간체 형식을 한 이 짧은 소설은 갑작스럽게 고삐를 잡아채듯 끝나 버리며, 무정하고 섹시한 여성 악당 레이디 수잔은 제인 오스틴의 세계에서 다시는 부활하지 못한다. 그의 교묘한 화술은 [노생거 애비]의 믿을 수 없는 이사벨라 소프에게, 대담한 성적 매력은 [맨스필드 파크]의 메리 크로포드에게 일부 주어지지만 레이디 수잔과는 달리 이들은 결국 벌을 받고 추방당한다. 제인 오스틴은 언니 카산드라에게 헌정한 이 소설을 다시는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한 [엘리노어와 매리앤]은 [이성과 감성]으로, [첫인상]은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 후 출간한 것을 생각해보면 주목할 만한 차이다.

영화와 원작을 비교해 보면, 제인 오스틴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원작 속 인물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무시하거나 낭만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영화 [레이디 수잔]은 “제인 오스틴은 이렇게 말했다”와 “제인 오스틴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를 절묘하게 조합한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진짜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못됐고 겁 없는 친구처럼. 멍청한 남자는 더욱 멍청해지고 여성을 억압하는 이중 잣대를 향한 냉소는 더욱 싸늘하며, 원작에서는 파멸을 피한 정도로 만족해야 했던 레이디 수잔에게도 더 큰 승리가 주어진다. 영화의 성공에는 자유를 원하지만 자신을 가둔 틀 밖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그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기를 택한 여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주연 배우 케이트 베킨세일의 공이 크다. 원작을 읽으며 자신의 대사 대부분이 제인 오스틴이 쓴 그대로임을 깨닫고 감탄했다는 그는 레이디 수잔을 초기 페미니스트 전사로 묘사하며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레이디 수잔]을 본 후에야 이 베테랑 배우가 얼마나 낭비됐는지를 깨달았다는 평들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영화 꽤나 본 관객들에게 더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질 때도 되었건만, 여성이 재량을 발휘할 무대는 아직도 이렇게나 적다는 뜻이 아닌가. 영화 [레이디 수잔]의 신선함을 환영하는 호평들은 200년 전을 살았던 제인 오스틴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는데도 여전히 충분히 하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니 아직도 제인 오스틴이냐고 섣불리 불평하지 말자. 그런 말은 단 한 명의 여성도 레이디 수잔이 미소 띤 얼굴로 싸워야 하는 이유를, 그리고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가장 매혹적인 창조물을 숨겨두어야 했던 이유를 긴 주석과 역사 강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날이 오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목록

SPECIAL

image 김생민의 영수증

MAGAZINE

  • imageVol.171
  • imageVol.170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