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민주주의의 유형], 우리의 초현실적인 성취

2016.12.16
역사의 한가운데 있다 보면 오히려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낸 건지 알려면 어느 정도 거리감이 필요하다. 대통령 탄핵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도, 더 좋은 공화국을 만드는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말도 다 옳다. 하지만 말이지, 우리 동료 시민들이 끝내주게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건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사실이다.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 보드카는 ‘ABSOLUT KOREA’라는 타이틀로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이 타이틀마저 실제로 벌어진 일에 비하면 소략하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나? 내가 가장 먼저 제외하고 싶은 설명은 ‘혁명’이다. 2016년 겨울의 동료 시민들은 체제를 바꿔내지 않았다.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싸움은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복원하는 것이었는데, 광장의 주권자들은 체제가 주권자의 명령에 따를 것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믿음으로 헌정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요구했다. 혁명적 수단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광장의 주권자들은 입법부를 움직여 헌법에 보장된 방식으로 요구를 달성했다. 광장의 무기는 횃불과 단두대가 아니라 입법부와 헌법이었다.

이것은 승리가 사소하거나 한계가 있거나 예측 가능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다.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승리는 거의 초현실적인 성취였다. 주권자들은 6주 동안이나 광장에서 놀라운 집중력으로 기존 체제의 도구를 집요하게 작동시켜 통치자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냈다. 통치자와 주권자가 정면충돌할 때 체제가 주권자에 복무한다는 사실이 돌이킬 수 없이 입증되었다. 이 당연해 보이는 한 문장은 지구에서 극소수 국가만이 도달한 경지이며,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가 증명한 적 없었던 명제다. 한국은 힘으로 체제를 때려눕히는 경험에서 다시 결정적인 한걸음을 나아갔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거리감과 입체감을 가지려면 좌표축을 확장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는 우리에게 앞·뒤축을 제공해 주며, 지금이 얼마나 독특한 순간인지 과거와의 비교로 알려준다. 그리고 하나 더, 옆으로 놓인 축이 필요하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 체제의 좌표를 찍을 수 있다. 이런 분야를 비교정치학이라고 부른다. 비교정치학의 손꼽히는 거장 아렌드 레이프하트의 [민주주의의 유형]은 36개 민주주의 국가를 비교 분석해 여러 체제의 특징과 장·단점을 밝혀낸 고전이다.

책은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구분을 축으로 전개된다. 다수제는 승자독식형, 합의제는 비례성 높은 연정형 모델을 생각하면 얼추 비슷하다. 한국은 꽤 분명한 다수제 민주주의이고, 그중에서도 아주 독특하게 대통령제다(대통령제는 36개 국가 중 6개밖에 없다). 내각책임제 정부 수반의 임기는 입법부의 뜻에 달려 있다. 대통령제의 정부 수반은 입법부와는 별개의 정통성을 가지며 헌법으로 임기를 보장받는다. 이 비교 덕분에 우리는 2016년 겨울이 얼마나 대단한 시간이었는지 깨닫는다. 대통령제 정부는 거의 붕괴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료 시민들은 그걸 해냈다.

이제 자신의 힘을 확인한 주권자들은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 다음 과제에 도전한다. 우리의 경험 안에서만 주고받는 왈가왈부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어떤 헌정 원리에서 살고 있는지, 이웃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해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가치를 선택한 것인지, 그 포기와 선택의 목록을 어떻게 재구성할지, 고민하는 민주주의자에게 이 책은 탁월한 길잡이다. 민주정의 주권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두근거리는 경험인지를 알아 버린 이라면 이런 고민을 외면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이제 정치가 삶에 녹아든 질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2016년 겨울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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