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여배우’│③ 우리가 새롭게 만난 여성 캐릭터들

2016.12.20
“그냥 어떤 남자의 애인, 아내, 엄마”, 배우들도 영화계 관계자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현재 한국 상업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여기 갇혀 있다고. 수년째 이어지는 가뭄 속에, 많은 여성 배우는 시간과 싸우며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캐릭터를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배우와 함께 빛난 올해의 여성 캐릭터들을 돌아봤다. 2017년에는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기를.

다시는 어린이를 무시하지 마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김말순
“저는 김말순이고요! 우리 할아버지 찾았어요?” 동진초등학교 일학년, 여덟 살 김말순(김하나)의 기세는 거침이 없다. 할아버지가 악당들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언니와 단둘이 남겨진 어린 소녀란 으레 순수하고 약하고 무력하게 보호받는 존재로 그려질 것 같지만, 우리의 김말순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애처롭게 도와달라 호소하는 대신 뚱한 표정으로 상대를 똑바로 쏘아보며 하고 싶은 말을 호통치듯 내뱉는다. 눈치 빠르면서도 눈치 보지 않는 대담함으로 홍길동(이제훈)을 비롯한 어른들을 끊임없이 당혹스럽게 만들고, 기민한 임기응변으로 동료들을 위기에서 구하며,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웃음까지 책임진 최고의 신 스틸러이자 개성 강한 사이드킥. 

두려움 없는 연인들, [아가씨] 히데코와 숙희
“예쁘면 예쁘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사람 당황스럽게시리.” 아마도 숙희(김태리)는 히데코(김민희)에게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저택에서 인형처럼 길러지던 아가씨와, 그의 인생을 훔치러 간 하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도 복잡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다. 히데코의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에, 이글대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숙희의 야성에 서로 빠져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어색했을 것이다. 물론 이 대담한 설정의 바탕에는 영국 작가 새라 워터스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 [핑거스미스]가 있지만, 영화평론가 듀나의 표현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일종의 ‘팬픽’이다. 그리고 숙희와 히데코는 자신들을 착취하던 남자들의 뒤통수를 때리고 낯선 땅으로 떠났으니, 사랑과 자유를 쟁취한 두 연인을 위해 건배!

언젠가 나였던 소녀, [우리들] 이선
체육 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무리에 끼워주길 기대하는 소녀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집에서는 착한 딸이자 제법 어른스런 누나, 하지만 학교에선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선(최수인)에게는 친구가 없다.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만든 작은 관계가 세상의 전부 같은 열한 살의 한 철, [우리들]은 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소녀의 일상이 어떻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지 섬세하게 그려내며 선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결핍을 포착한다. 또래 여자아이들의 친구에 대한 애착과 관계성을 진지하게 탐구한 영화의 태도는 선과 갈등을 빚은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 역시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로 약하고 미성숙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누구나 누구에게서도 조금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끝까지 가는 여자, [비밀은 없다] 김연홍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남편 종찬(김주혁)의 유세 첫날, 외동딸 민진(신지훈)이 실종되면서 김연홍(손예진)의 ‘행복이 가득한 집’은 산산조각난다. 공부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고 유명인사인 남편의 세계를 중심으로 별다른 의심 없이 살아온 김연홍의 각성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딸을 찾기 위해 “생각하자. 생각하자”를 정신없이 중얼대며 5만 통이 넘는 메일함을 뒤지고 벽지를 뜯어내고 굿판까지 벌이는 과정에는 숨 막히는 쾌감과 불편함이 동반된다. 김연홍은 모성에 상처 입은 여성이지만 숭고하거나 무결한 피해자로 남아 있길 거부하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자해, 공갈협박, 함정수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히스테릭한 몸짓과 말투는 물론 화장, 의상, 시선까지도 ‘자식 잃은 어미’에게 세상이 기대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끔찍하게 집요한 여성은 모두의 동정을 사는 대신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비극의 시작이자 끝과 마주하고 만다. 용서도 자비도 없는,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범한 아줌마가 아니잖아요, [범죄의 여왕] 양미경
양미경(박지영)은 빨간 하이힐을 신는다. 미스 춘향 출신, 간간이 불법 시술도 하는 동네 미용실 주인, 의료보건법 위반으로 경찰에게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잖아요!”라는 꾸중을 듣기도 한 그가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든 것은 다 큰아들의 수도요금 때문이다. 고시생 아들을 벌써부터 ‘이 판사’라 부를 만큼 끔찍이 사랑하는 고슴도치 엄마지만, 그의 모성이 드러나는 형태는 수수함이나 순박함, 눈물겨운 헌신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당당함과 용기다. 눈앞의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자신을 ‘아줌마’라 무시하는 남자들에게 태연히 말을 놓으며 문제를 척척 해결해나가는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영화가 막을 내린 뒤에도 종종 떠올라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지는 날의 초상, [죽여주는 여자] 소영
“노 워크, 노 머니(No work, No money)” 젊어서는 동두천에서, 나이 들어서는 종로 일대에서 성노동자로 일하며 살아가는 예순다섯 살의 ‘박카스 아줌마’ 소영(윤여정)의 모토는 단순하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인적 드문 산중턱까지, 그는 자신이 ‘먹고살려고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신산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염치와 자존심 같은 감정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신세한탄 대신 삐딱한 농담을 던지며 생을 견디는 이 노인의 개성은 물론 상당 부분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매력으로부터 기인한다. 특히 살인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 소영이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담배를 빌려 피우는 모습은 윤여정의 1985년작 [에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하다.

꿈도 열정도 없이, [걷기왕] 이만복
번화한 대도시도, 외딴 시골도 아닌 강화도 어딘가에 사는 고등학생 이만복(심은경)은 뭐만 타면 멀미를 한다는 것 말고 별다른 게 없는 소녀다. 무디고 느긋한 성격에, 특별히 잘하는 것도 절박한 사연도 없던 그가 경보의 세계에 입문해 우여곡절 끝에 전국체전에서 우승! 하는 반전 드라마는 없다는 게 이 영화의 반전이다. 만복은 그냥 만복이고, 스포츠 소년만화의 노력형 천재처럼 보이지만 부상으로 인한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육상부 선배 남수지(박주희), ‘공무원 같은 거 말고’ 진짜 꿈을 말해보라는 담임(김새벽)에게 버럭 짜증을 내며 “칼퇴근 하고 집에서 맥주나 한 캔 때리고 싶다”고 말하는 만복의 친구 최지현(윤지원) 역시 ‘여고생’의 스테레오타입에 갇히지 않은 캐릭터로 각각 빛난다.

마성의 연인, [연애담] 지수
연애의 고수란 이런 것일까. 아직은 어색하고 미묘한 탐색이 오가는 자리, “남자친구 없어요?”라는 윤주(이상희)의 조심스런 질문에 지수(류선영)가 “없어요”라는 대답 대신 눈을 맞추고 웃으며 “내가 남자친구 있을 것 같아요?”라고 반문하던 순간, 윤주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을 게 분명하다. 여자와 연애 경험이 없는 윤주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관계를 주도하는 지수의 자유분방한 매력과 자신만만한 성격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평범한 딸’의 자리로 돌아가 이성애자로서의 역할 수행을 기대받으면서 드러내는 위축되고 이기적인 모습과 합쳐지며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한다. 사랑하지만 원망스럽고, 헤어지자니 또 마음을 흔들어놓는 애증의 상대, 이 연애담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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